[문학비평용어] 역설 (paradox)
[문학비평용어] 역설 (paradox)
겉으로 보기에는 명백히 모순되고 부조리한 듯하지만
표면적인 논리를 떠나 자세히 생각하면 근거가 확실하거나 진실된 진술
또는 정황, 본래는 수사법의 하나로서 청중의 주의력을 환기시키는 데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였다.
<무신론자처럼 신의 존재에 대하여 관심이 큰 사람은 없다>는 말에 우리는 처음에는 그 명백한 비논리성에 당혹을 느끼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근본적으로 옳은 말이라는 수긍을 하게 된다.
의혹이 그 정반대의 수긍으로 급변하는 데에서 우리는 쾌감을 느낀다.
그러한 즐거운 수긍에 도달하기 위한 긴 설명과 설득의 과정이 역설적 진술로 말미암아 일거에 생략된다.
일상 생활에서도 <좋아서 죽겠다> 같은 역설적 표현이 많이 사용되지만
대게 말버릇처럼 되어 있어서 경이감을 일으키지 못한다.
합리주의적 철학에서는 일체의 역설적 요소를 제거하고 논리적 연속성을 추구하였으나,
현대에서는 우주의 본질이 논리적 연속성으로 설명할수 없음을 시인하고
논리의 단절을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는 본래 논리적 단절과 그로 말미암은 역설을 가장 중요한 진술 방식으로 삼고 있다.
<죄가 많은 곳에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많다>는 예수의 역설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 죄를 더 많이 지어야겠다는 역설이 생겼다.
신비주의적 종교의 진술들, 이를테면 참선하는 사람의 명상의 제목,
<도를 도라 할 수 있으면 도가 아니다> 같은 도교의 잠언등은 모두 역설들이다.
문학은 설득의 방법으로서의 수사학적 역설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근본에 있어 직선적 논리에 의하지 않고 논리의 단절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이루는 직관에 의하여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자연히 역설법을 사용하게 된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는 한용운의 역설은
이별이 이별이 아닐 수 있는 높은 경지에 대한 직관적 표현이다.
<찬란한 슬픔의 봄>이나 <슬플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처럼
사람의 정서의 단절적 상황을 드러내는 역설도 있다.
뉴크리티시즘에서는 문학, 특히 시의 언어는 <역설의 언어>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였다.
논리의 연속성에 근거한 과학 및 철학의 언어와는 다르게,
문학은 세계에 대한 또 다른 독자적 인식 방법이라는 뉴크리티시즘의 입장에서는 그런 주장이 나올 법하다.
과학에서 보면 시의 진술은 대부분 비합리적이나,
우리가 시를 무의미하다고 내버리지 않고 또 다른 차원에서
그 타당성을 수긍하는 것만 보아도
시의 언어가 근본적으로 역설적이라는 말도 시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