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동안의 고독...
계간 문학동네 1997년 여름/제4권 제2호/통권11호/특집I 90년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순환과 묵시의 서사
-백년 동안의 고독의 신화 비평적 읽기
서성철
마르케스마르께스 1. 문학의 원형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이 출판된 지 어언 30년이 지났다. 미국이나 서구 문학에 익숙한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이름은 그리 낯설지 않다. 『백년 동안의 고독』이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데에는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마치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읽는 재미에 빠진 사람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면, 작품을 통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작가 특유의 유머나 아이러니, 패러디에 감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부류의 독자들은 소설을 문자 그대로 읽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만약 어느 누구가 이 소설에서 콜롬비아 아니, 더 나아가 라틴 아메리카의 착취와 폭력의 근대사를 발견한다면 그는 이 소설을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었다는 말이 된다. 문학을 사회와 정치에 관련시켜보자면 『백년 동안의 고독』은 그 자체로서 훌륭한 텍스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읽는 것이 스코틀랜드의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면 『백년 동안의 고독』 역시 문학 밖에 나타난 어떤 지식을 얻고자 함이 아니다.
사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한국에서 이런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혀졌고 이해됐는데 이런 배경에는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소위 제3세계(필자는 아직도 이런 낡은 용어를 써야 하는지에 회의하고 있다)에 속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작가고 또 그가 한국에 소개된 시점이 70년대, 80년대라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는 1900년대 초, 콜롬비아에서 일어난 자유파와 보수파와의 싸움(천일전쟁), 미국인들의 도래, 바나나 플랜테이션(‘유나이티드 푸르츠’사가 모델이 되는)의 등장과 착취와 같은 실제 사건들이 언급되어 있으며, 그리고 이어지는 노동자들의 학살, 도시의 파괴, 몰락 등등과 같은 장면 묘사는 우리들의 이런 정치·사회적 관점에 입각한 해석을 어느 정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문학도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단히 소박한 알레고리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이런 류의 설명은 의식하든, 안 하든 선악의 이분법과 같은 도덕적인 알레고리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아노 대령이 황금 물고기를 주조했다가 용해하고, 또 그것을 반복하는 행위, 그의 여동생이 수의를 짰다가 풀고, 또 짜는 행위, 소설 속의 인물들의 똑같은 행위의 반복 등등을 라틴 아메리카 4백여 년 역사의 희망 없는 좌절의 역사로 보는 것이나, 또 중남미인들의 행위의 무위성, 무의미성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부엔디아 가문의 멤버들을 지배하는 고독, 그러니까 라틴 아메리카를 지배하는 고독은 숙명적으로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 그것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서는 사랑이라는 길밖에 없지만, 『백년 동안의 고독』의 주인공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런 고독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을 지녔기 때문에 이런 인물들의 사랑 역시 필연적으로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근친상간은 라틴 아메리카의 자폐된 세계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관점에 입각한 해석은 일견 타당성이 있기는 하지만 사회나 역사의 주체인 인간 본질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해, 이 소설은 한 인간이 권력을 포함해 모든 것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의 영혼과 사랑을 잃으면 어떤 식으로 전락하고 파멸하느냐 하는 인간의 보편적 운명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정해진 운명 안에서의 인간의 편력의 역사는 비록 비극으로 끝날지언정 그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지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모든 문학작품 속에 서사적인 면(이야기에 중점이 있다는 뜻에서)과 주제적인 면, 이 두 가지가 존재한다면, 그리고 한 문학작품에 대한 연구가 내용과 형식에 관한 연구라면 『백년 동안의 고독』은 그 제목 자체로 대단히 시사적이다. ‘고독’이 주제(내용)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백년’은 그 시간적 의미와 함께 작품의 서사적인 면을 포함한 플롯(형식)에 해당한다. 이제까지의 비평과 작품의 해석은 주로 주제적인 면에 치중되어 있었는데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빠져 있다.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한 작가로서 고심한 것은 일관된 어떤 주제의식의 견지가 아니라, 그가 설정한 테마(예를 들면 고독)를 어떻게 끌고 나가야만 하는가에 대한, 다시 말해 작품상의 톤의 문제였다. 실제,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이 문제점을 토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쓰는 데 있어 작가에게 보다 중요했었던 것은 이 소설의 결말을 어떻게 끝낼까라고 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 어떤 식으로 진행시킬까 하는 데 그의 고충이 있었던 것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는 수많은 인물들(7대에 걸친 남성 주인공들은 호세 아르까디오 아니면 아우렐리아노와 같은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이 등장하고, 사건들(그 사건들의 대부분은 동일한 사건의 반복이다) 또한 어지럽게 깔려 있지만 이 작품을 반복해서 읽다보면 거기에는 지속적인 어떤 흐름이 있다. 즉 시간 속에서 움직이는 리듬이나, 공간 속에서 반복되는 패턴을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들은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백과전서적인 지식들이나, 원형이나 인유(allusion) 등과 같은 인류가 축적해온 문학적 경험들을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포스트모더니즘 시각에서는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이 언급되겠지만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문학의 기원 연구 " 이제는 식상한 용어가 되어버린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용어도 그것이 실제 비평에 들어가면, 아무리 상호텍스트성의 원의미가 문학의 기원 연구가 아니라고 부정해도 모방과 영향 관계를 따진다 " 가 아니라 이러한 수많은 문학의 관습이 한 작가의 작품에 어떠한 구성원리로 작용하는 형식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에 신화비평의 근거가 있다.
실상, 『백년 동안의 고독』에는 수많은 민속 모티브들, 신화, 에피소드 등 인류가 시간을 통해 쌓아올린 모든 문학적 경험들이 한데 녹아 있다. 마콘도의 창시자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의 연금술에의 탐닉은 불멸을 갈구하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상기시키며, 그의 아들인 아우렐리아노의 전쟁의 참가와 마콘도로의 귀향은 분명히 오딧세이의 귀환 모티브와 연결되어 있다. 황금을 찾아나서는 주인공들의 여정은 중세 아더 왕의 성배 신화와 관련되어 있고,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의 시대에 보이는 성적인 광란과 가축의 다산은 디오니소스 축제에 다름아니며, 포식과 낭비와 과도한 연회 장면은 라블레적 그로테스크를 우리에게 연상시켜주며, 어린 주인공들이 삘라르 떼르네라나 뻬뜨라 꼬떼스와 같은 창녀들과 성적 교섭을 갖는 것은 원시민족의 할례의식이나 사춘기 이니시에이션에 다름아니다. 또 『백년 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에서 나타나는 성격이나 행동양식, 즉 꿈과 현실, 이성과 광기, 절제와 정상에서의 일탈,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등등은 니체가 이야기한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로적인 것의 두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결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보다 가르시아 마르께스가 그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빌려온 가장 중요한 틀은 모든 서구문학에 상상력과 동기를 불러일으킨 바이블이나 그리스 고전신화일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백년 동안의 고독』은 서사시이고, 비극이고, 로맨스이며, 신화이다. 그것은 협소한 의미에서의 장르적 구분이 아니라 한 문학과 다른 문학과의 관계, 즉 프라이적 의미의 원형(archetype)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원형을 통해 『백년 동안의 고독』은 모든 인류의 문학 전통 안에 끼워넣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소설에서 관심을 갖는 부분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 중에서 가장 독창적이라는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작품이 전체 문학의 구조물과 비교해 어떤 유사함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보편적 의미의 탐구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흔히 이야기하듯, 포스트모던적 작가가 아니다. 차라리 그는 정형성이나 질서를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철저히 고전주의 작가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의 형식이나 구조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비평가들이 흔히 말하듯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식이나 구조로 수렴, 결합되며, 또 상호텍스트성의 강조에 의해 작품의 권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강조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바흐친류의 다성주의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소설은 철저히 전지전능한 존재로서의 작가에 의해 서술되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블이 문학비평가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서구 문학작품 속에서 수없이 언급·인용된다든지, 바이블에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교훈이나 도덕이 많이 산재한다든지 하는 이유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이블이 가지고 있는 전체적인 형태와 구조일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천지창조에서 시작해서 최후의 심판에서 끝나는, 인류가 겪을 수 있는 모든 과정이 하나의 전체로서 이야기될 수 있는 신화(물론 필자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신화는, 그리스어 ‘미토스mythos’가 가진 본래의 의미, 즉 “신화는 이야기되어진 것”을 의미한다)의 가장 완전한 형식이다. 바이블에서 경전적 의미를 배제하고 읽는다면, 그것은 더할 나위 없는 훌륭한 이야기의 집합체인 것이다. 사실 성서를 뜻하는 ‘바이블’이라는 말은 원래 작은 책들을 뜻한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백년간에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승리와 좌절의 대서사시이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면 소설의 시간관은 시작은 종말에 내재되어 있고, 종말은 시작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종말론적 시간관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간관 안에서 움직이는 영웅들의 행동이나 사유 패턴은, 신약 속의 사건들은 구약 속에 예시되어 있고, 모든 구약의 사건들은 신약에 의해서 완성된다는 성서예형론(typology)의 ‘예언(type)’과 ‘실현(antitype)’의 두 축에 있다. 바이블과 비교할 때 고전신화는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상상력의 몇몇 기본 패턴을 보여준다. 고전신화는 영웅의 신비한 탄생과 승리, 결혼, 죽음과 배반, 그리고 최후에 가서의 재생을 말해주고 있는데 이 패턴은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끝없는 반복과 회귀의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
2. 행동의 비극적 리듬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나 인물들의 행동을 마음속에 그려보면 그 모든 것은 하나의 무대로 초점이 모아진다. 그것은 부엔디아 가문의 흥망성쇠를 압축해주는 집일 것이고, 무대를 넓히면 마콘도 도시가 될 것이다. 이 무대 안에서 인간의 삶의 모든 양태들, 사랑, 전쟁, 증오, 죽음 등이 하나의 연극처럼 전개된다. 비록 『백년 동안의 고독』이 연극 드라마는 아니지만 이 소설 속에서 전개되는 사건들이나 인물들의 행동을 연극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것은 이 작품이 문학의 위대한 전통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행동의 모방 패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염두에 두면서 “비극은 행동의 모방”이라고 말했다. 즉 비극에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주인공들이 갖는 성격이 아니고 플롯이라고 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비극의 주인공들은 신이나 영웅들의 행동 패턴에 따라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한 현대 소설과 기원전 5세기의 한 드라마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이 두 작품에 존재하고 있는 내적인 유사성, 즉 드라마적 구조와 형식의 유사성일 것이다. 추측이지만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그리스 비극의 본질적인 원칙들을 잘 이해했고, 또 그 원칙들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그의 작품에 새롭게 구현시켰다. 이들 비극은 인류의 영원한 테마인 삶과 죽음, 운명에 대한 탐구 노력이며 또 인간이라는 존재에 내재하는 갈등과 모순에 대한 문제제기다. 또한 양자가 지닌 작품의 미덕은 각자가 비극의 중심을 공동체의 삶에 맞춘 데에 있다. 즉, 이 두 작품들에서는 개인의 운명과 한 사회의 운명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과 『백년 동안의 고독』을 연극적·제식적 형식의 관점을 통해서 보면 제일 먼저 드러나는 것은 편력신화의 원형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출발―시련―귀향의 패턴이 깔려 있다. 우선 영웅이나 구원자는 여행을 떠나야 하며, 또 그 여행을 통해 부딪히게 되는 불가능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다시 말해 괴물과 싸워 이기고,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고, 왕국을 살리고 공주를 구하기 위해 장애물들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러나 때때로 영웅은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서, 마을의 죄를 씻고 황폐한 대지를 회복하기 위해 죽어가야만 하는 속죄양이 될 수도 있다. 영웅으로서의 오이디푸스는 자기의 출생 비밀을 알기 위해 여행을 떠나 스핑크스가 부과한 수수께끼를 풀면서 재앙에 빠진 테베 왕국을 구한다. 그 결과로 왕이 되고 여왕과 결혼한다. 뒤에 그는 왕의 살해범으로 밝혀지면서 두 눈을 찢고는 유랑길을 떠난다. 이 모습은 영락없는 한 희생양, 파르마코스(pharmakos)의 모습에 다름아니다. 여기서 인간이 건설한 세계의 안녕과 자연의 질서는 한 개인의 운명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또다시 재앙에 든 테베 왕국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인간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자기가 저지른 죄의 대가에 울고 있는 왕이면서 이제는 한 희생양인 인간을 통해서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의 행동 패턴은 이 양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질 않는다. 그 중에서도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인물은 소설 속의 최초의 인물인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아르까디오는 그리스 신화상에 등장하는 낙원의 이름이고, 부엔디아는 스페인어로 ‘좋은 날’이라는 뜻이다)와 최후의 인물인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의 에피소드에서이다. 이 대표적인 두 에피소드는 풍요제식의 양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데, 이런 형식은 현대 작가의 독창적인 창조물이 아니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친숙해진 신화, 또는 제식에 다름아닌 것이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 역시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문화적 영웅 중의 하나이다. 그는 부족을 이끌고 도시를 세우며, 마을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땅과 물을 배급하는,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모방해야만 할 모범적 영웅이며 도시의 안녕을 책임진 지배자이다. 그러나 그의 광기는 결국 그를 마콘도의 무대로 사라지게 하며, 뒤에는 나무에 묶여 죽어간다.
눈먼 예언자 티레시아스를 통해 테베 왕국에 엄습한 역병의 원인이 전왕인 라이우스를 살해한 자가 처벌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그 살해자를 찾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오이디푸스의 두번째 탐색이 된다. 오이디푸스의 운명에 있어 티레시아스와의 만남이 그런 것처럼 호세 아르까디오와 멜끼아데스 " 그는 부엔디아 가문의 비밀과 마콘도의 운명을 미리 한눈에 알고 있는 예언자이다 " 와의 만남 또한 결정적이다. 발명을 하고, 바깥세계와의 접촉을 위해 바다를 찾아나서는 모험 등이 도시의 복지와 관련이 있는 모험이라면, 이 멜끼아데스와의 만남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에게 있어 존재의 비밀을 찾아나서는 두번째 편력인 셈이다. 그가 환상이나 연금술에 빠질 때 부엔디아 가문과 마콘도 도시는 동요하고 그가 현실로 돌아올 때 가정과 도시는 재건된다. 이런 정신적 편력은 작품 속에서는 멜끼아데스의 양피지의 비밀을 캐내려고 시도하는 수많은 주인공들의 시도에서 잘 나타나 있다. 모든 주인공들의 두번째 탐색신화의 궁극적 의미는 바로 이 자기존재의 비밀의 추구에 있다. 그것은 『백년 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의 행동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지만 과거의 숨겨진 진실에 대한 탐색으로 파멸하는 비극적 영웅의 대표자는 마지막 아우렐리아노일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탐색의 끝무렵에 그 자신(도시의 구원자)과 죄지은 자, 테베의 재앙을 동시에, 하나로서 파악하기에 이를 때, 마지막 아우렐리아노는 부엔디아 가문을 짓눌러왔던 근친상간의 실현을 통해, 그의 존재의 비밀(버려진 사생아)을 알게 되며, 최후에 부엔디아 가문의 백년간의 역사가 기록된 양피지의 비밀을 해독하는 순간 한 개인과 가족, 도시가 파멸되고 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건 『백년 동안의 고독』의 주인공들이건 간에 모든 영웅들의 편력은 다 똑같이 실패한 영웅들의 편력담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종국에 가서는 모두들, 재앙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의 존재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시초에는 모두들 승리한 영웅들이었지만 이런 승리 자체가 바로 그들 자신을 파멸시키는 모티브가 되는 것이다. 아우렐리아노 대령은 전쟁의 영웅이고 승리자였지만 패배한 영웅으로 고향에 돌아온다. 후반기의 삶은 밀폐된 방에서 끝없이 황금 물고기를 만드는 데 나머지 생을 바친다. 세속적인 의미에서 그들의 탐색은 실패했을는지 모르지만 또다른 의미에서는 성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탐색신화들은 나라고 하는, 우리들 각자가 가진 존재의 비밀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모호성과 같은 인류의 영원한 테마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 모두는 그들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조절할 수도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고통받고 그런 운명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였다는 사실을 발견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 각각은 자기의지의 능동적 시도이기 때문에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비극이 단순히 비극으로서만 끝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그리스 비극의 고정된 형식은 『백년 동안의 고독』이 가지고 있는 풍요 드라마의 제식적 순서와 관련이 있고, 또 영웅의 편력신화의 기본단계와 일치하고 있다. 1) 아곤(Agon): 투쟁. 빛과 어둠, 여름과 겨울, 낡은 해와 새해의 싸움. 2) 파토스(Pathos): 일반적으로 제식적이거나 희생적인 죽음. 산 채로 갈기갈기 찢겨져 죽은 오시리스나 디오니소스, 히폴리투스의 경우. 일명 스파라그모스(sparagmos). 3) 메신저(Messenger): 관중의 눈앞에서 상연될 수 없는 경우에 사자(使者)가 나타나 새로운 소식을 전한다. 4) 테르노스(Thernos): 탄식이나 호곡(呼哭). 5) 아나그노리시스(Anagnorisis): 발견이나 인지(認知), 죽은 자나 산 채로 찢겨진 신(Daimon)의 인지, 어떤 의미에서는 부활이거나 신격화(Apotheosis)에 의해 발견이나 인지가 일어남.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의 몰락은 에피소드의 후반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마콘도 마을에 집단 망각의 전염병이 들이닥칠 때, 마을의 지도자로 등장하는 것은 더이상 그가 아니라 그의 아들인 아우렐리아노이다. 호세 아르까디오의 미친 행동, 환상세계로의 몰입으로 인한 현실감의 결여는 마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의 재앙이다. 이때 아우렐리아노가 그를 나무에 묶는 것은 프레이저가 이야기한 살왕의식(殺王儀式)과 십자가 처형에 다름아니다. 즉 이제까지는 사회의 안녕과 자연 일반의 운행이 그의 생명에 긴밀하게 의존했으나 그의 부패나 불안정은 공동사회의 건강에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다. 아우렐리아노가 그의 아버지를 희생시키는 것은 분명히 여름과 겨울의 ‘아곤’, 젊음과 늙음 사이에 벌어지는 제식적 싸움이며, 또 그가 나무에 묶이는 것은 그의 제식적인 죽음이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왕으로서 인지되는 것은 그가 죽은 뒤 찾아오는 한 원주민 하인 " 그는 인디오 왕족의 후예로서 부엔디아 집안의 하인이었으나 마콘도가 재앙에 빠졌을 때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다 " 이라는 한 사자(메신저)에 의해서이다. 그는 왜 찾아왔냐는 물음에 “왕의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왔어요”라고 대답하는데, 이 한마디로 신성한 왕에 대한 모든 인지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호세 아르까디오가 죽었을 때 “노란 꽃잎”이 마치 비처럼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소설 속의 표현은 ‘아나그노리시스’는 부활이나 신격화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재삼 확인시켜준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 만물이 울었다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신이나 신성한 존재가 죽을 때 자연현상에 이변이 일어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도 인간처럼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감정의 오류’에 다름아니며, 한편으로는 신화적인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 꽃잎으로 산산이 흩어지는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의 모습은 디오니소스의 찢겨진 육체(스파라그모스)를 상기시켜주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의 부활한 모습을 동시에 보여준다. 디오니소스의 갈기갈기 찢겨진 육체가 곡물의 씨앗의 의인화라는 것을 안다면 이런 풍요 재생의 신화는 금세 이해될 것이다.
‘아곤’에는 싸움 형태의 제식과 성행위의 제식이 있다. 싸움 형태의 제식에서는 누가 이기고 지느냐에 따라 한 해의 풍작과 흉작이 결정된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싸움에서는 항상 여자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래야만 되는 이유는 여성은 출산의 담당자이고, 또 여성의 출산은 자연의 풍요와 결부되어 있다는 ‘공감주술’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싸움은 여성과 남성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의 가면극만을 보아도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봉산탈춤에서 취발이와 노장의 싸움은 당연히 취발이가 이기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취발이가 이겨야만 노장의 색시를 빼앗아서 아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감을 차지하기 위한 젊은 첩과 본처인 미얄 할멈과의 싸움에서는 첩이 이기게 되는데, 할멈은 더이상 출산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름과 겨울의 싸움에서 반드시 여름이 이기는 것은 아니다. 겨울이나 암흑이 승리할 때에는 희극적 갈등은 역전되어 비극적인 갈등구조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1세대부터 7세대까지 바로 이런 ‘아곤’의 드라마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호세 아르까디오가 자기의 이복 여동생인 레베까와 결혼하기 위해, 이탈리아인 삐에뜨로 끄레스삐(동생의 애인)와 싸우는 장면은 전형적인 여름과 겨울의 싸움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가 마콘도의 집으로 다시 귀향하는 그의 모습은 희극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 “엄청나게 큰 성기”를 가진 그의 모습은, 희극은 남근 숭배사상(phallic song)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에 대한 정의를 반영해주고 있다. 작품에서 불모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페르난다와 딸인 메메의 싸움은 또 하나의 전형적인 여름과 겨울의 싸움이다. 딸이 승리할 때 부엔디아의 집에는 희극의 양상이 찾아오고, 다시 어머니가 이길 때 비극의 양상(한 사회나 가족의 성원을 추방시키거나 분리시키는 것)이 도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상층 귀족들 사이의 갈등이나 분규를 다루는 연극은 항상 비극으로 나타나기 마련이고 사회적 지위가 다른 상하층 계급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은 희극으로 나타난다고 정의했는데, 이런 갈등구조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끝없이 반복되며, 하나의 원형적 패턴을 구성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갈등은 부엔디아 가문의 성원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또 부엔디아 가문의 성원과 이방인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으로 일별할 수 있는데, 전자가 비극으로 형상화된다면 후자는 희극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백년 동안의 고독』은 전체적으로 행동의 비극적 리듬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비극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것의 주 모티브가 바로 백년간에 걸쳐 부엔디아 가문을 위협하는 근친상간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비극적 카타르시스는 공포와 연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민이 어떤 예기치 못한 불행에 의해서 일어난다면 공포는 우리들 자신과 같은 사람의 불행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한다. 따라서 그가 결론지은 바에 의하면 비극적인 주인공은 완전히 두 개의 극단적인 선과 악 사이에 놓여져 있는 중간자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비극적 주인공은 그가 겸비한 덕과 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아니면 확연히 드러나는 악덕이나 타락에 의해서 불행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비극적 흐름’, 즉 그리스어로 말하면 ‘하마르티아’(인간의 과오라는 뜻임)에 의해서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덧붙이길, 이 ‘하마르티아’만 가지고도 충분히 비극 작품을 쓸 수 있다고 한다. 드라마에 있어서건 삶에 있어서건 가장 친숙한 패턴은 이 ‘하마르티아’로 인해 행복에서 불행 또는 비참함으로 전락하는 인간 행동의 패턴이다. 그런데 이런 불행이나 재앙의 주기는 당대에서 끝나면 좋은데 세대를 두고 이어지는 것이다. 즉, 죄로 야기된 불행은 조만간에 이 악을 행사한 인간에게 보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보듯, 과욕(hybris)을 부리는 자는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로 고려되어 그에게는 반드시 인과응보가 뒤따르게 되어 있다. 이 ‘히브리스’는 올림픽 신들 사이에 정해진 윤리로서 그 핵심은 각자에게 주어진 질서를 존중하고, 타인의 경계선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 비극의 운명관을 잘 나타내주는 ‘모이라(Moira)’ " 이 용어의 어원은 각자에게 할당된 몫이라는 뜻이다 " 라고 하는 개념이다. 즉, 신과 인간의 영역 안에서 자기 분수를 지키지 않고 그 경계선을 넘는 자는 바로 자연의 균형을 깨뜨린 자로서 그는 자연의 질서를 원상태로 회복시키는 신, 즉 복수의 여신에 의해 응당한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해서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나 호머의 서사시에 나오는 대부분의 영웅들이 여기에 속한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부엔디아 가문의 일원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 ‘하마르티아’에 의해 움직이며 고통을 받는 인물들이다 이것이 소설의 비극적 실체를 구성하고 있다. 마콘도의 창건자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저지르는 과오는 ‘타부의 깨뜨림’이라는 모티브이다. 그것은 살인과 근친상간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예는 많은 비극작품들에서 보여진다. 에우리피데스의 『에우메니데스』에서 오레스테스가 자기 어머니인 클리타임네스트라를 죽이는 행위, 『오이디푸스 왕』에서의 근친상간, 『햄릿』에서의 클라디우스(햄릿의 삼촌)가 형을 살해하고 형수하고 결혼하는 것 등등은 바로 위에서 말한 ‘타부의 깨뜨림’을 보여주고 있는 잘 알려진 예이다.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부재중 잠깐 동안 마콘도를 독재적으로 다스리다 정부군에 의해 총살당하는 아르까디오나 절제할 수 없는 탐욕으로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는 아우렐리아노는 ‘히브리스’에 의해 희생되는 전형적인 ‘파르마코스’이다. 마지막 근친상간을 벌이는 아우렐리아노는 마치 오이디푸스처럼, 이미 예정되어 있던 작품의 비극적 흐름에 의해 전락하게 되는 비극적 영웅의 예이다.
3. 순환에서 묵시로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행동은 자연의 주기적 리듬, 다시 말해 태양이나 계절의 변화와 결부지어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에 프라이 같은 문학비평가는 봄―여름―가을―겨울의 계절적 사이클을 문학 장르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희극은 봄에 해당되며, 그 중심 테마는 영웅의 한 사회로의 복귀나 통합이다. 플롯 자체는 황무지에 대한 삶과 사랑의 승리이다. 소설 속에서 이 양상은 마콘도 창시자의 삶에 해당될 것이다. 여름이 로맨스와 아날로지(analogy)될 때, 이 양상의 주된 내용은 영웅의 탄생과 결혼, 그리고 편력의 테마가 될 것이다. 이 단계는 『백년 동안의 고독』 중에서 가장 많은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에피소드에 해당되는데, 이 에피소드에서 특징적인 로맨스 요소는 아우렐리아노 대령에게서 보여지는 명예와 그의 여동생 아마란따의 정조에 있을 것이다.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이 단계(여름)에도 4개의 봄―여름―가을―겨울 양상이 들어가 있다. 아우렐리아노 대령은 “3월”에 태어나, “5월”에 결혼하며, “10월 1일”에 군인으로서 마지막 전투를 끝내며 “12월”에 전쟁을 완전히 포기한 뒤 고향으로 돌아온다. 장군으로서 그가 전쟁에서 손을 떼는 것은 영웅으로서의 상징적인 죽음을 뜻하며, 그것은 겨울의 양상에 속한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바라보면 뒤이어 등장하는 쌍둥이 형제 " 아우렐리아노 세군도와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 " 의 시대는 집으로 상징되는 부엔디아 가문의 실질적 몰락, 미국인과 함께 들어온 바나나 플랜테이션의 도래, 노동자들의 학살, 폭력과 마콘도 도시의 파괴가 시작되는 단계로, 계절적인 주기에서 보자면 가을의 양상을 품은 비극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아이러니는 영웅들이 사라진, 다시 말해 이상화된 존재가 더이상 없는 황무지로 대변되는 겨울의 세계이다. 이 단계의 주인공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로서 그는 더이상 부엔디아 가문의 영웅을 대변하고 있지 않다. 성서예형론적 알레고리에서 보자면 그는 그의 성(姓) 바빌로니아에서 보듯 ‘좋은 날(Buendia)’의 대극이 되는 바빌론의 대음녀이다. 이 시기에 모든 것은 해체되고 무질서로 복귀한다. 특히 마콘도의 봄에 등장하는 여성 주인공들, 우르슬라(도덕성의 화신), 풍요와 성(性)의 상징적 여신에 비유될 수 있는 삘라르 떼르네라(삘라르는 스페인어로 기둥, 축軸을 뜻하고, 떼르네라는 암소를 의미한다), 아마란따(그녀는 출산의 여신이로되 그 자신은 처녀로 남아 있는 그리스의 대모신 아르테미스에 다름아니다) 등 모든 신화적 인물들이 죽는다.
프라이의 봄―여름―가을―겨울의 리듬은 그 자신이 인정하듯이 비코의 역사 인식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비코는 역사를 움직이는 중심 법칙으로서 두 가지 원칙을 설정한다. 즉, 문명은 앞으로 끊임없이 진전한다고 하는 법칙(corso)과 한편으로는 문명은 탄생하고 발전하다가 소멸된다는 문명회귀의 법칙(ricorso)이 그것인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역사의 사이클은 신화적 시대(신의 시대), 영웅의 시대(귀족정치의 시대) 그리고 인간의 시대로 구분되며 마지막으로 ‘리코르소’가 일어나면서 모든 과정이 최초의 시대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다. 신의 시대에는 권위적인 아버지가 가족을 지배하는 세계고, 또 이 시기에 인간은 가족의 발전을 통해 최초의 사회형식을 만들어낸다. 사람들은 설명할 수 없는 자연현상의 신비로운 힘에 의해 지배된 사회에 살며, 이때 인간들의 야만적인 본성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신화적 사유에 근거한 자연법과 관습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인류 유년시기의 인간들은 서로간의 소유물들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에 비해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은 그들의 사유재산을 불리게 되며 이로 인해 개인과 집단 사이에 차별이 일어나면서 사회적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해서 인류의 두 번째 시대인 일종의 귀족정부로 특징지어지는 영웅의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데, 이 시기는 교회와 법, 제도가 정착되는 시기이다. 인간의 시대에서는 이성이 환상을 대체하며 정부형태는 모든 사람들이 법에 의해 동등하게 지배를 받는 자유로운 공화국이다. 그러나 이런 정부는 때때로 인간시대의 또다른 정부형태인 왕정에 의해 대체되기도 한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왕정이 역사의 마지막 단계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국가로 회귀하기 위해서는 왕정은 독재체제로 전환되는 것이 필연적으로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이 성공하지 못하면 외국정부의 지배나 야만족의 정복으로 인한 타락이 또다시 요구된다. 이것이 ‘리코르소’로 들어가기 위한 ‘코르소’의 마지막 단계인 것이다. ‘리코르소’는 혼돈, 무질서로 특징지어지는 계절적인 양상에서 보면 겨울에 해당하는 전이(轉移)의 단계다. 여기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지만 이런 비코의 역사인식은 소설도 소설이려니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발전단계를 함축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비코의 역사인식이 던져주었던 새로운 시각은 인류의 순환적 진화와 갱신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비코의 입장은 결코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이 그들에게 부여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역사를 구현한다. 그러나 그 역사의 창조는 신에 의하여 미리 정해진 계획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신의 섭리는 역사의 근원이고 최종 목표이며, 한편으로는 그 신의 섭리의 실현인 것이다. 그러니까 신의 ‘이상적인 영원의 역사’가 구현될 때까지 인간은 철저하게 신의 도구로서 그의 자유의지를 실천함으로써 역사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신의 섭리는 멜끼아데스라는 존재가 꾸민 계획에 의해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다. 왜냐하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이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에 의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프라이가 말한 계절적 패턴이나 비코의 역사 개념을 작품 속의 내재적 구조로 이용하지만 궁극에 가서는 바이블의 묵시적 구조, 그 비전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 엘리어트의 『황무지』나 조이스의 『피네간스의 경야』는 이런 점에서 대단히 시사적이다. 모두들 작품의 끝에서 혼돈의 마지막 시기, 해체의 시기를 상정하지만 전자가 기독교적 묵시의 비전으로 돌아간다면, 후자는 순수한 순환의 사이클을 견지하고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마지막 단계에서 아포칼립시스의 비전을 택하고 있다. 이런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역사나 국가의 순환 비전은 바이블의 예형론적 형식, 즉 바이블은 신의 섭리를 구현하는 인간들의 역사인식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역사의 시초는 나무와 연결되어 있고 종말은 개미들에게 먹히울지라”라는 예언자 멜끼아데스의 글귀 속에 『백년 동안의 고독』의 창조―묵시 비전은 함축적으로 드러나 있다. “유사 이전의 공룡의 알처럼 거대하고 하얗고 매끈매끈한 돌이 깔린, 맑은 물이 흐르는 강가”에 세워진 마콘도 마을은 순진무구한 에덴 동산이 가진 낙원의 비전에 다름아니다. 또 닭싸움으로 인해 친구인 쁘루덴시오를 죽이고 타락한 땅을 버리고 신천지를 찾아 떠나는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의 이야기는 원죄와 과오에 근거한 낙원에서의 추방 모티브를 취하고 있다. 그는 마치 이스라엘 민족의 창시자 아브라함처럼 21명의 친구(12부족이 아니라)를 데리고 “약속되지 않은” 땅으로 떠난다. 마콘도를 세운 뒤 만나게 되는 멜끼아데스는 창세기에서 빵과 포도주로 아브라함을 축복한 살렘의 왕이며 동시에 신비한 사제인 멜키세덱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는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에게 빵과 포도주 대신 자석과 확대경 그리고 연금술 도구를 선물하면서 축복을 내린다. 그가 마콘도의 미래가 씌어져 있는 양피지를 전달할 때 우리들은 『백년 동안의 고독』을 움직이는 동력인 예언의 양상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이야기가 창조에서 파괴로의 역사를 보여준다면 이런 진화하는 움직임은 예형과 본형이라는 예형론적 구조 안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구약에서 이삭의 희생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시하는 고전적인 예이다. 시편에 나오는 기도문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울부짖는 절규(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의 예시이다. 이럴 때 우리들은 전자를 예형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본형이라고 부른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1세대)에 의해 인도되는 마콘도는 목가적·낙원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촌락 마을로 상징된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노 세군도 시대(4세대)에서 보이는 마콘도의 이미지는 완전히 도시의 이미지이다. 전자의 시대가 연금술로 대변되는 정신의 고양에 있다면 후자의 경우는 타락된 물질문화를 반영한다. 1장에서 집시들의 방문(그들의 대표자는 멜끼아데스임)은 12장에서 바나나 플랜테이션(그 대표자는 미국인 잭 브라운임)이 마콘도에 들어오는 서술의 예형이다. 이 부류의 인간들이 외국인들이라는 데에서는 둘 다 똑같지만, 집시들이 유랑의 무리로서 잠시 머물렀다 가는 존재라면 미국인들은 장기 체재를 하며 마을에 심각한 불안을 조성하는 존재다.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들의 존재는 마법사(자연을 바꾼다는 의미에서)임에는 틀림없지만 미국인들은 자연의 파괴자로 나타난다. 이런 예형과 본형의 관계는 『백년 동안의 고독』의 내용이 타락과 파멸로 치닫는 아포칼립틱 구조를 확인해주는 좋은 예이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의 시대에 군대와 법, 교회, 제도의 출현이 마콘도에 위기나 전쟁을 야기시키는 예형이라면, 아우렐리아노의 시대에 들어오는 바나나 공장과 기계문명의 출현은 마콘도의 몰락을 실질적으로 재촉시키는 악의 근거로서의 본형이다. 3장에서 마콘도의 주민 전체가 불면증에 걸리고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재앙은, 16장에서 4년 넘게 내리는 비의 직접적인 재앙으로 바뀐다. 마지막 장에서 보이는 “성서적 폭풍”은 백년 동안에 일어난 재앙들(내란, 집단적 망각, 노동자 학살, 홍수와 한발, 개미의 침입) 중 일곱번째 재앙으로서 그것은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타나는 모든 재앙들을 종합하고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마콘도의 창시자의 두 아들인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아우렐리아노는 아버지의 두 속성인 육체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을 각각 대변하는데, 이들은 뒤에 등장하는 여러 남자 주인공들의 예형이 된다. 마지막 주인공인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7세대)에 와서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의 특성(성적인 활력과 지혜)은 통합·완성된다. 그것은 최후의 여주인공 아마란따 우르슬라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의 이름이 보여주고 있듯이, 그녀는 아마란따(2대조 할머니. 에로티시즘의 화신)와 우르슬라(1대조 할머니, 도덕성의 화신)라고 하는 전세대의 두 인물들의 속성을 한몸에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전체를 통해서 근친상간의 가능성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와 아마란따 우르슬라 부부에 의해 결국 실현될 때까지 언제나 기대감으로 남는다. 최초의 근친상간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에 의해 시작되며 세대를 통해 계속 부엔디아 가문을 위협하는 요소로 등장한다. 그리고 근친상간의 결과로서 백년 동안 주인공들을 끊임없이 위협해왔던 괴물의 출현은 돼지 꼬리 달린 아이의 탄생으로 실현된다. 그리고 멜끼아데스가 쓴 양피지의 비밀은 이 아우렐리아노에 의해 해독된다. 그러면서 그는 오이디푸스적 자기 출생의 비밀과 자기와 성적 교섭을 한 여자는 다름아닌 숙모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동시에 부엔디아 가문의 멸망과 마콘도 도시의 사라짐은 실현되는 것이다.
요약해보면 『백년 동안의 고독』에 등장하는 모든 주인공들의 행동이나 사건들은 바로 이 아우렐리아노라는 한 인물로 수렴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서 예형론적으로 보면 그는 구약의 모든 예언을 한몸에 실현한 유일한 ‘피구라(Figura)’인 예수처럼 소설 속에서 하나의 ‘피구라’로 등장, 통합의 역할을 하고 있다. 『백년 동안의 고독』은 어쩌면 이 유일한 배우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바이블의 모든 사건들이 한 사람의 신, 예수의 등장을 위한 수많은 사람들의 역사라고 해석하는 것이 예형론적 해석이라면, 마콘도의 창건자로부터 바나나 공장의 기계공인 마우리시오 바빌로니아(마지막 아우렐리아노의 아버지)는 『백년 동안의 고독』에서 유일한 ‘피구라’인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의 출현을 예고하는 부차적인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들을 뒤에서 움직이고 조종하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마지막 통합이나 실현의 조건들을 부여하는가? 그는 물론 멜끼아데스로서, 마치 엘리어트의 『황무지』에 등장하는 티레시아스처럼, 부엔디아 가문과 마콘도의 창조에서부터 종말까지를 위에서 훤히 내려다보고 있다. 그는 젊었다가 늙었다 자유자재로 변모하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시공을 초월한 존재이다. 히브리서(7 : 3)를 보면 멜키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전통적으로 예수의 예형으로 간주되어왔는데 그것은 그가 가지고 왔던 빵과 포도주의 선물에 기인한다. 멜키세덱이건 멜끼아데스건 둘 다 “인간의 얼굴로 위장한 성령”으로서 신의 도래를 알리는 주의 천사인 것이다. 멜끼아데스는 마콘도를 방문, “부엔디아 집안의 모든 면모를 말끔히 제거한, 유리로 지은 집들이 가득 찬 위대하고 빛나는 도시”를 예견한다. 그는 어린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를 향해 이런 말을 한다. “나이가 백 살이 될 때까지는 어느 누구도 이 원고의 내용을 알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소설 끝부분에 나오는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의 출현을 예고하는 말이다. 실상 멜끼아데스는 백년간이나 그의 신성한 계획을 실현해줄 가장 적합한 인물을 찾고 있었던 것이며, 마침내 그런 인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히브리서(5:11)에는 “멜키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가 어려우리라”고 되어 있다. 이 말은 바로 멜끼아데스에게 해당되는 말로서, 결국 『백년 동안의 고독』의 이야기 전체는 이 멜끼아데스의 신비를 캐는, 범위를 좁혀서 말하면 양피지의 비밀을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수많은 인물들의 편력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소설 맨 마지막 장에서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멜끼아데스의 원고를 해독할 때 소설도 끝난다. 이런 점에서 멜끼아데스와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동일한 한 인물이다. 왜냐하면 마콘도의 백년간의 흥망성쇠의 역사가 기록된 멜끼아데스의 원고는 바로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의 창조부터 종말까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바이블의 중심이 예수의 재림에 있다면 『백년 동안의 고독』의 그것은 사라진 멜끼아데스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기대감에 있다. 왜냐하면 마콘도가 “유리로 지은 집들이 가득 찬 위대하고 빛나는 도시”가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은 사실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 마음속에 일어나는 현시(顯示)라면 멜끼아데스의 그 집을 완성시키는 것은 결국 독자인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그리고 그 계시는 『백년 동안의 고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책을 덮을 때 우리에게 다가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