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창작론

현대소설과 문체의 중요성

글길_문학 2009. 12. 2. 15:34

현대소설과 문체의 중요성

 

 

 

김원우 (소설가)

 


 
근대 내지 현대소설의 출발점은 지금으로부터 크게 봐서 400년 정도밖에 안 됩니다. 영국에서 17세기부터 근대소설이라고 부를 만한 이름이라는 양식의 문학이 싹트기도 했습니다. 일종의 천박한 상놈의 문학이라고 해도 좋은 일상 생활을 그리는 독특한 장르는 350년 전부터 출발했지만, 그 동안 100년 정도의 공백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세기말이나 19세기초부터 본격적으로 근대소설이 출발되는데, 리얼리즘, 모더니즘, 요즘은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출발 당시 대단히 비천한 장르였던 소설은 아주 융성하다가 요즘은 영상매체 때문에 소설의 존립 자체가 상당히 흔들리고 있습니다.
 
 소설이 처음 출발할 때는 정보 전달의 수단으로서 큰 역할을 했습니다. 17세기만 하더라도 아직 증기기관차와 같은 게 발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국민 교육이 보편화되지 않아서 풍문 이상의 정보를 전달하려면 마차를 이용하여야 했습니다. 초기에는 편지 형식이 많았고, 일기 형식이나 고백 형식으로 풀어놓은 것이 근대 소설의 출발점입니다. 그 당시에는 자본주의의 문명 자체가 본궤도에 오르지 않은 초보 단계여서 소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가 정보로서의 가치가 굉장히 컸습니다. 신문 다음으로 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본질적인 흥미 같은 것도 있고, 소설의 정보 전달이 큰 소임을 다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소설의 발전 단계가 거의 막판에 와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앞으로 소설문학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가 될 것입니다. 3백년 동안 계속 소설이 개량되어 왔고, 정확하게 발을 똑같이 맞추면 문명 자체도 옛날 중세 때의 백년 이백년이 요즘은 1, 2년 정도밖에 안 걸릴 정도로 문명이 급속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소설은 정보전달 매체로서의 효과가 별로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요즘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를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신문에도 흔하고, 인터넷에 들어가면 모든 정보를 쉽게 접할 수 있으며, 비디오를 보면 소설보다 훨씬 흥미 있고 희한한 사건들을 알게 됩니다. 요즘 소설 독자들이 자기가 어떤 소설에 대해 들었을 때, 소설이라는 이름 하에서 그 이야기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19세기 중엽에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그 내용 자체는 천박한 이야기지요. 1820년대 당시 불란서의 조그만 농촌에서 한 의사부인이 자기는 늘 소설을 좋아하고 공상하기를 좋아했는데 늘 파리가 그리웠습니다. [마담 보바리]에 나오는 주인공의 남편은 한지 의사인데, 마담 보바리는 권태에 찌든 나머지 두 번에 걸쳐 바람을 피우고 간통을 합니다. 간통을 저지른 뒤에 빚에 쪼들리다가 나중에 자살해 버립니다. 남편은 순박하고착한 사람인데 뒤이어서 자살을 한다는 내용입니다. 소설에 채용된 사건 자체는 플로베르 주변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플로베르의 아버지는 의사였는데,그 밑에서 조수로 있던 사람이 그 비슷한 사건을 일으켰다가 지방신문에 보도가 되었습니다.

 

 전편에서 문장 하나 뺄 게 없는 플로베르처럼


 플로베르는 그 사건을 토대로 약간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좋은 문체의 소설을 만들었습니다. 내용 자체는 아무 것도 없고 진부해 빠지고 식상하기에 딱 좋은 내용입니다. 지금 모든 세계의 소설 이론가들이나 혹은 소설 연구가들은 [마담 보바리] 한 편을 지금까지 나온 소설의 최고봉으로 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부 그것을 연구하고 극찬을 합니다.

[마담 보바리]는 4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전편에서 문장 하나 빼버리면 작품 전체가 완전히 무너진다고 할 정도로 필요 없는 문장이나 단어가 없이 완벽하게 조립되었다고 합니다. 플로베르가 첫 문장을 쓰기 위해서 스물 일곱 번이나 고쳐썼다고 합니다. 플로베르는 평생을 독신으로 산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부인 유부녀와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이 작품을 가지고 죽겠다는 식으로, 30대 중반 5년 동안 그 한 편에 매달렸습니다. 정부한테 부친 편지에 보면 두 줄을 쓰기 위해서 이틀을 멍하게 보냈다는 구절도 나옵니다. 플로베르의 문장은 긴 것은 아주 길고 복문이나 중문이 많은가 하면, 가끔씩 중간에 아주 짧은 단어나 문장을 곳곳에 집어넣습니다. 그 정도로 문장만 길고 닦아서 농촌의 권태로운 이야기나 풀 위에 가만히 엎드린 다리 긴 곤충을묘사하는 이야기가 희한하게 나옵니다. 그 맛을 요즘의 일반 독자들은 모릅니다. 요즘처럼 빨리 돌아가는 세상에서는 영화의 영향도 있지만 계속 액션을 치는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묘사가 너무 심하고 사건 진행 속도가 너무 느린 플로베르 소설 속의 묘사를 일반 독자가 따라오기는 힘이 듭니다. 그런 희한한 맛을 알기 위해서는 문장의 감각을 익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내용 자체는 의미가 없습니다.


 [마담 보바리]는 여유 있는 유부녀가 젊은 남자와 또 중년의 귀족 비슷한 사람과 두 번에 걸친 간통 사건을 둘러싼 별것도 아닌 내용입니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로, 소위 말하는 문체 자체가 소설계를 평정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위대한 작품으로 숭상받는 요인은 문체에 있다는 것입니다. 문장 하나가 빠뜨릴 게 없고 정말 완벽하다. 심지어는 불어에 능통한 불란서 사람일자라도 문학의 문장 감각을 스스로 개발을 해서 맛보는 감각과 교육 수준이 되지 않으면, 그 문체를 못 따라간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꼼꼼하게 읽어야 하고, 읽으면 읽을수록 씹히는 맛이 있고, 묘사가 눈에 빤히 보이듯이 그 당시불란서 농촌의 권태로운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고 널리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국 현대 소설이 걸어가야 할 길은 어디일까요. 대다수의 소설들, 특히 젊은 친구들의 소설은 주인공이 근대인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근대나현대인들은 현대 문물 자체를 능수능란하게 쓰면서 자존 자립, 홀로서기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만이 근대인이고 현대인일 뿐 그런 게 안 되어 있는 소설들이 많습니다. 그런 소설들이 아무리 번역을 해서 떠든다고 해도 서구 사람들이 볼 때는 주인공은 기생계급입니다. 자기의 홀로서기가 안 되어 있는 주인공이 공연히 왔다갔다 바쁘게 여관에 갔다가 친구를 만나서 술을 마시는 내용입니다. 자기의 주체, 요즘 이야기로는 정체성 즉, 아이덴티티가 없는 소설입니다. 우리의 현실 자체가 모든 물질문명은 서구 사회에 못지 않게 되어 있지만, 곳곳에 구멍이 뻥뻥 나 있는 부조리의 세계를 많이 봅니다. 그런 사회에서 좋은 소설이 나오기는 굉장히 힘듭니다. 자본주의의 성숙도에 정확하게 비례해서 소설도 성숙됩니다. 일본 작가들이 우리 나라 작가들보다 소설을 잘 쓰는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가 그 정도로 성숙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소설이 엉뚱한 것과 싸우고 있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살면 제대로 사는 것인지, 아주 근본적인 문제 말고 공연히 사회에 나와서 불평불만이 많습니다. 곳곳에 사회적 구조 자체가 안정이 안되어 있으니까 아직은 불평불만의 요소가 많습니다. 부정부패도 너무 많아서 기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와 주인공이 쓸데없는 것으로 싸웁니다. 그런데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부정부패와 같은 것이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나라는 소설가들이 분명히 다른 것과 싸웁니다. 서구 사회에서 우리를 보면 아직도 야만인이라고 봅니다. "한국은 아직도 본질적인 의미에서 고도의 문명사회가 아니다. 그런 데서 무슨 소설이 옳게 나오겠는가"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의 성숙도와 소설의 성숙도는 항상 한가지입니다.어떻든 내용 자체의 한계가 있는데 오늘날 정보 전달이 별 의미가 없으니까 내용 자체는 차치한다고 해도 우리 문체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베스트 셀러 작가들의 작품도 읽어보면 문체 자체가 아주 비논리적이고 주인공의 주체성, 홀로서기가 안 되어 있는 문체가 많습니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문체가 독창적이지 않은데 내용이 독창적일 수가 없습니다.

 흔히 심사평 같은 것을 보면 엉뚱한 사람들은 문장은 좋은데 내용이나 소재가 어떻고 주제가 안 살았다고들 하는데 그건 엉터리입니다. 문장이 좋으면 다 좋은 것입니다. 문장이 좋은 사람이 내용을 엉터리로 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내용 자체보다도 문체 자체가 안 갖춰져 있기 때문에 한국 소설이 아직도 지지부진합니다.


 독자에 영합하지 말고 문체의 독창성 확립해야


 우리 나라의 문체가 확립된 지는 백 년도 채 안됩니다. 이인직의 [혈의 누]가 1893년인가 발표되었는데, 우리 근대 소설의 초로 보면 백여 년쯤 되었습니다. 이인직의 [혈의 누]와 같은 소설을 오늘날의 문장 감각으로 보면 못 읽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소설은 문체가 확립된 지 3, 4백년 되었습니다. 우리의 문체가 최근에는, 1960년대 이후부터 3, 40년 동안 자유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소위 영어를 제도권 안에서 받은 사람들은 관계 대명사를 아주 많이 쓰고, 절과 구, 복문과 중문을 잘 써서 우리 나라도 어느 정도 문체가 좋아지고 있습니다. 지적인 문체도 간간이 어느 정도 아주 자연스럽게 잘 녹아 들어가 있는 문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베스트 셀러 작가라고 떠드는 사람도 문체가 없는 사람들은 곧 죽습니다. 우리 나라의 평론가들도 엉터리가많고 문학사나 소설사가 제대로 정리가 안 되는데, 제 생각으로는 문체의 독창성 독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소설사에 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용 자체는 뻔하니까 똑같은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문체를 감각을 가지고 자기 자신만의 독창적인 문체로 만들어서 쓰는가에 따라서 소설의 수명 혹은 소설의 보편성 같은 게 저울질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사상 어떤 것은 오래 남고, 어떤 것은 이내 죽어 버리고….


 그렇게 중요하다는 문체가 도대체 뭐냐고 반문할 분도 계실 것입니다. 흔히 문체를 둘러싸고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문장삼회(文章三易)라고 했습니다. 문장은 우선 보기가 쉬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말로도 할 수 있는 것을 한자를 사용하여 어렵게 쓰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우선 독자들이 알기 쉽게 써야 합니다. 나아가 그러면서 적확한 문장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번역서가 많이 출간되는 등의 영향으로 우리말의 체계에 어울리지 않는 말들을 쓰는 작가들이 크게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소설가들이 쓴 글 가운데에도 의미가 잘 전달이 되지 않는 글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우리 것을 되찾고, 우리 어법에 맞는 문장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문장 감각을 어느 정도 일반화시킨 돌아보면 우리의 언어 체계가 깊은 사상, 이데올로기나 혹은 자연과학의 깊은 이론 같은 것을 거듭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라틴 계열은 2, 3천년 전부터 언어를 개발해서 순수과학 쪽에도 정확한 표현력을 길러 낼 수 있는 언어의 용량 자체가 많이 개발되었습니다. 식물의 학명 같은 것도 그런 것입니다. 철학도 우리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 때문에 아무리 쉽게 쓴다고 해도, 고도의 전문적인 설명력 같은 것은 우리 언어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미비 때문에 힘이 듭니다. 전 세계의 7천만이 한글을 쓰고 있으니까 개발을 시켜야 합니다. 이북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라고 어울리지도 않는 말을 쓰는데, 언어 자체에서도 너무 폐쇄성을 고수할 것이 아니라 열어 놓을 것은 열어 놓으면서 여러 가지의 언어를 개발해야 할 의무 같은 것도 있습니다. 내가 볼 때는 오늘날 문학에서 언어의 세련도를 제일 높일 수 있는 장르는 소설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과학 같은 데서 아무리 위대한 책을 쓴다고 해도 전부 지식의 기능밖에 없어서 언어의 세련도를 높이는 것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어떻든 이런 구비조건들을 갖추고 난 뒤에, 더 고도의 사상, 이데올로기 같은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길은 자기 이름에 부끄럽지 않는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전검하는 사환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 소설이 맡아야 할 당면 과제는 문장의 정확도와 세련도, 문체 자체의 독창성입니다. 독보적인 시각이 있어야만 내용도 자연스럽게 따라오고 그 내용 자체는 오늘날 근대인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서구인들도 우리 소설을 보고, "아, 이제는 상당하다.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고 말하면서 긴장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거듭 자신만이 지닌 문체의 독창성이 확립될 때 세계적인 문학은 탄생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다음으로는 질의 응답을 통해 논의의 초점을 분명히 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빨리 돌아가는 시대에 맞선 글쓰기의 정직성을


 문; 문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시작한 건 처음 소설부터 궁금하고 선생님의 소설이 알려지고 난 다음부터 소설을 더 과감하게 쓰게 되었는지, 조심스럽게 쓰게 되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저는 소을음 하나 써 봤는데 제가 왕인 것처럼 제 마음대로 써 보았는데 선생님의 글은 어떠신지 모르겠습니다.


 ; 내가 처음 소설을 쓸 때부터 문체를 의식했는데 언어의 허영 같은 게 많아서 공연히 어렵게 쓰고 쉬운 말을 적합하게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최인훈 선생이 자기가 젊었을 때 쓴 [광장]이라는 소설을 여섯 번 정도 고쳤다고 합니다. 젊을 때는 다섯 개밖에 모르는데 열 개를 안다는 과시욕 같은 것이 있습니다. 젊을 때는 누구나 문자를 많이 씁니다. 최인훈 선생이 계속 고친다는 것은 전부 한글로 쉽게 고쳐서 독자들한테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덕분에 [광장]은 스테디 셀러로 읽히고 있습니다. 처음 발표했을 때의 딱딱한 문장은 공연히 젊었을 때의 과시 벽이고 허영스러운 문자를 쓰고 싶은, 그런 문장을 고치지 않고 계속 나두면 지금 안 읽힐 겁니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계속 변화되니까 시대에 맞춰서 계속 쉽게 고치는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저도 20년 전에 쓴 것을 보면 낯간지러운 부분이 많습니다. 기회가 되면 쉬운 말로 고치려고 합니다. 문장이 안 풀리면 머리 속의 쓸 내용 자체는 이미 몇 개월 전부터 그려져 있는데 막상 원고지에 쓸려고 하면 한 문단이 시작되는 첫 문장의 첫 자를 뭘로 시작할까를 신경을 쓰는데 앞부분에서 잘 안 풀립니다.


 문; 현대 소설에서 말줄임표가 남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답; 말줄임표는 보통 점이 세 개, 말없음표는 여섯 개가 관례적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 나라 대중 소설에 보면 흔히 여자가 말이 없다고 해서 한 칸이 넘어가 버립니다. 외국은 이런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말줄임표는 세 개로 표시해야 정확하다고 보는데, 출판사마다 규칙이 달라서 말없음표와 똑같이 여섯 개를 하기도 합니다. 말줄임표가 남발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학생들한테 가르칠 때도 끝까지 완벽도를 높여서 정확하게 묘사를 하게 하고 줄이는 것은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문장을 신문 기사체처럼 완성을 시키지 않고 말을 나열한다든지 영화 비슷하게 만화 속의 풍성걸처럼 문장을 완성시키지 않고 단어 나열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게 전부 문학의 통속화, 저속화를 부채질하는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가 본격적으로 소설의 수준을 더 고도로 세련시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성취욕구 같은 게 적고 쉽게 독자들한테 아부해서 빨리 페이지 수나 넘어가는 안이하고 쉬운 통속 소설들을 쓰려는 경향이 적지 않지요. 통속 내지는 대중 소설적인 취향 자체가 독자들과 호흡이 잘 맞아서 그에 대한 작가도 비겁한 행위 내지는 안이한 태도가 많이 보이는 게 우리 소설 발전의 걸림돌입니다. 더 완벽하게 묘사를 끝까지 물고 늘어져 자기만의 독특한 표현을이끌어내야 합니다. 학생들이 써오는 작품이나 일반 기성 작가들도 대충 이야기하고 말줄임표를 해버립니다. 우리 사회가 너무 겉돌고 허영에 부황한 사회가 문장에서도 반영된 것입니다. 공연히 들떠서 일확천금을 노린다든지 한탕주의라든지 모든 게 문장 속에서도 반영이 됩니다.


 문; 우리 나라 작가 중 문장을 잘 쓰는 다섯 분을 얘기하셨는데 그 이름을 공개해주셨으면 합니다. 선생님은 언제부터 작가가 되고 싶으셨습니까? 그리고 작가의 삶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 후회하십니까?


 답; 이문구 씨가 충청도 지방 특유의 구어체 문장을 쉽게 풀어씁니다. 그분은 우리의 잊혀진 말을 너무 많이 발굴해서 계속 사전을 찾아봐야 합니다. 그분은 세 가지 조건을 정말 잘 구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분의 작품을 보면 절대 종결어미가 반복이 안 됩니다. 한 문장이 끝나고 난 다음 한 페러그래프(문단) 속에서 있었다가 반복이 안되고 전부 달리합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한문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경우도 많이 보고, 행갈이를 못하는 기성작가들도 많은데 이문구 씨는 그 부분에서는 정확한 것 같습니다.

오정희 씨가 문장이 정확하다고 하는데 초기작을 보면 한 문장 속에 비유법, 직유가 2, 3개씩 들어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게 과연 옳은 것인지 긴 문장 속에 비유법을 두 개씩 넣는 것은 욕심 사납고 의미 전달력도 약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법 구조는 아주 정확하고 유희적 기능은 잘 살리는 사람입니다. 문장의 정확도나 논리적 구조 같은 것은 많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여성 특유의 자기 취향 같습니다.

박상륭 씨는 철저한 구어체입니다. 전라도 방언식으로 계속 주절주절 타령에 가까운 독특한 독보적인 것입니다. 그건 문법으로 설명을 못합니다. 지시적 기능이나 통사구조, 어미구조와는 전혀 별개이고 그야말로 우리 가락입니다. 한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락입니다. 내용 자체가 너무 난해하고 문체 자체가 그런 식으로 독보적이고 독창적이어서 자기가 보는 세계도 형이상학적 세계인 영적인 세계를 많이 그립니다. 소설이 그것까지 감당을 해야 하는지, 오늘날 아무리 소설이 정보전달력이 약화되었다고 하지만 다른 얘기도 많은데 있을 수 있느냐 하는 의미에서는 문제가 많습니다. 우리의 평이한 문체를 다른 어떤 쪽으로 개발시키려고 노력하는 부분에서는 박상륭 씨도 아주 탁월한 분입니다.

 문; 문장 얘기를 많이 하셨는데 어휘가 풍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휘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습을 해야할까요?


 답; 어떤 사람들을 보면 형용사나 명사가 한 페이지에 계속 나옵니다. 그건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럽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비유 기능이나 은유 기능이 없기 때문에 따분하게 같은 말이 반복되는데 사고폭이 그 정도로 짧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말이라도 말의 뉘앙스는 다 다릅니다. 언어 용량이 풍부하고 정확하게 문장을 잘 쓰는 사람들의 좋은 문장들을 읽으면서 계속 노트에 메모를 해야 합니다. 좋은 소설은 한 페이지에 사전을 한 번 정도는 꼭 찾을 수 있게 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의 통속 소설이나 대중 소설은 5시간 정도면 쉽게 읽을 수 있는데 내가 몰라서 사전을 찾아봐야 하는 단어는 하나도 없습니다. 특이한 표현이 나오면 적어놓고 사전을 찾아서 자기의 용량을 자꾸 넓혀 나가야 합니다. 자기의 어휘량을 늘리고 문장을 쓰면서 쓰임새를 개발해야 합니다. 정상에 올라간 것을 뽐내기보다는 항상  새로운 목표를 찾아 더욱 분발해 주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