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사와 설명
.'달이 밝다'는 묘사문이고, '달은 밝다'는 설명문이다. '이'와 '은'의 토씨 하나가 다른데도 글의 기능과 그 맛은 전연 달라진다. '달이 밝다'는 것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달이 환히 떠오른 정경을 나타내는 묘사문이다. 그러나 '달은 밝다'는 달의 속성이 밝은 것임을 풀이하고 정의하고 있는 설명문이다.
.기행문은 묘사문이지만 여행 안내서는 설명문이다. 어느 때 묘사문을 쓰고 어느 때 설명문을 써야 하는지, 그것을 구별할 수 있게 되면 글쓰기의 반은 성공한 셈이다.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데생 실력이 필요한 것처럼 소설가에게 있어 문장력은 가장 기본이 된다. 소설 창작에서는 특히 묘사가 바탕을 이룬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는 화병에 장미꽃 한 송이를 꽂아 놓고 이를 몇 백장 아니 몇 천장이라도 묘사할 수 있는 기량을 갖추어야 한다.
'화병에 꽂힌 붉은 장미'
이것은 가장 기초적인 묘사 문장에 해당한다. 여기에 화병의 모양과 장미꽃의 빛깔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묘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화병이 크리스털 화병이라면,
'주둥이가 만개한 백합꽃처럼 활짝 벌어진 엷은 물빛의 투명한 크리스털 화병에 꽂힌 검붉고 싱싱한 장미 한 송이'
라고 묘사를 확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장도 완벽한 것은 아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시각적인 것과 그 향기를 표현할 수 있는 후각, 그리고 장미에 대한 관찰자의 느낌 등도 얼마든지 곁들여질 수 있다.
'어느 낡은 폐가게 들어섰더니 이름 모를 잡초만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다.'
이것은 소설가의 문장이 아니다. 소설가의 문장은 보다 완벽한 묘사문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찌그러진 채 반쯤 열려 있는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자 지열과 함께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훅 덮쳤다. 이은 지가 오래되어 흑갈색으로 퇴색한 초가 지붕은 그 동안 비에 삭고 바람에 날려 곧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묘사는 언어를 통하여 감각 경험을 재현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논리적 사유에 의하여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그 의미를 보다 강하게 하기 위한 예술적인 문장인 것이다.
이 마을 한구석에 모화라 부르는 무당이 살고 있었다. 모화서 들어온 사람이라 하여 모화라 부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은 마을의 어느 여염집과도 딴판이었다. 그것은 한 마리 찌그러져 가는 묵은 기와집으로, 지붕 위에는 기와버섯이 퍼렇게 뻗어 올라 역한 흙냄새를 풍기고 집 주위는 앙상한 돌담이 군데군데 헐리인 채 옛 성처럼 꼬불꼬불 에워싸고 있었다. 이 돌담이 에워싼 안의 공지 같은 넓은 마당에는 수채가 막힌 채, 빗물이 고이는 대로 일년 내 시퍼런 물이끼가 뒤덮여, 늘쟁이, 명아주, 강아지풀, 그리고 이름도 모를 여러 가지 잡풀이 사람의 키도 묻힐 만큼 거멓게 엉기어 있었다. 이 도깨비굴같이 낡고 헐리는 집 속에 무녀 모화와 그 딸 낭이는 살고 있었다.
김동리 <무녀도>에서
위 글에서 과 은 설명문이고 는 묘사문이다.
묘사의 첫걸음은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대상의 모양이나 빛깔, 감촉, 냄새, 소리, 맛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것이다. 독자는 그것을 읽고 상상력을 통해 묘사된 대상을 머리 속에 구체적으로 재생시킨다.
'해가 진다'
라는 표현은 가장 단순한 관찰을 통한 진부한 표현이다. 해가 지는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서는 해가 지는 모습뿐만 아니라 시간이 조금씩 흐름에 따라 하늘과 햇살과 산과 대지 등 대자연의 모습과 관찰자의 느낌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자세히 통찰하고 거기에 걸맞는 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발끝으로 들어갔다. 방은 차양의 레이스 끝을 통해 어두운 황금빛이 가득 퍼져 있었고 그 사이에 양초가 창백하고 가냘픈 불꽃처럼 보였다. 그는 관 속에 눕혀진 상태였다. 내니가 솔선하여 우리 셋은 침대 말미에 무릎을 꿇었다.'
――제임스 조이스 <더불린 사람들>에서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에서 파리에 있는 하숙집의 겉모습과 집안 구석구석을 자세히 묘사하고 나서야 그 집에 하숙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목로 주점>의 작가 에밀 졸라는 소설을 쓸 때 도면을 미리 그려 놓고 장면 전환을 묘사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뛰어난 묘사는 그 작가의 창작하는 자세와 깊은 관계가 있다. 얼마나 성실하고 치열한 태도로 작품을 쓰느냐에 묘사의 깊이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 소재나 주제, 구성, 인물 창조 등 모두가 중요하겠지만, 소설을 써나가는 데 있어서 주제를 풀어 나가고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가장 중요한 기술적 도구가 묘사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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