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란 무엇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소설은 무엇인가? 문학, 더구나 한국의 소설문학을 전공으로 공부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는 20년이 지났으면서도 이 물음에 답하는 데에는 아직 자신이 없다. 필자가 워낙 둔재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제껏 어느 연구서적에서도 가슴에 와 닿는 적확한 답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이고 또 그만큼 막연한 문제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유형의 답이 나올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들이 '문학이란 언어를 표현수단으로 하는 예술의 한 형식이다'와 '소설이란 허구를 통하여 인생의 진실을 표현하는 산문 문학의 한 형식이다'라는 답이다. 이는 다시 '언어'란 무엇이고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허구'란 무엇이며 '인생의 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낳는다. 참으로 뜬구름 잡기가 아닐 수 없다.
다음의 이야기를 보자.
신라 경문왕의 이야기이다. 왕위에 오른 뒤 별안간 귀가 당나귀처럼 길었다.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그러한 줄을 알지 못하였으나, 유독 복두장 한 사람이 알았다. 그러나 그는 평생 동안 남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죽을 무렵에 도림사라는 절의 대나무숲 인적이 없는 곳에 들어가 대나무를 향하여 창(唱)하였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와 같으시다.] 그뒤부터 바람이 불면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 왕은 그 소리를 싫어하여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다. 그러나 바람이 불면, [우리 임금의 귀는 길어.] 라는 소리가 들렸다. -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경문왕조에서-
익히 알고 있는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문학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혼자만 알게 된 비밀. 결코 발설하여서는 안될 비밀. 그 비밀을 가슴속에 묻고 살아나가기에 복두장은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정말 가슴이 미어터지는 고통을 견뎌야 했을 것이다. 끝내는 참지 못하고 대나무 숲을 찾아 고함을 치고 만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이것이 바로 문학이 아닐까. 남 몰래 가슴속에 묻어둔 한마디 말, 한 구절의 이야기가 오랜 세월 동안 가슴을 저려오다 어느 순간 그것이 언어(그것이 문자로 된 언어이건 아니면 말로 된 언어이건 관계가 없다)로 터져 나왔을 때, 바로 그것은 문학이 된다. 이는 그 사람의 혼이 담긴 절규가 된다. 이런 절규는 사람을 감동시킨다. 사람뿐이랴, 대나무도 감동하여 바람이 불 때마다 되뇌이지 않았던가. 언어가 무엇이고 예술이 무엇인지 따질 필요가 없다. 문학은 바로 복두장이 외쳤던 절규와 같은 것이다. 혼자만이 알고 가슴을 태우며 지낸 한(恨)이 어느 순간 터져 나오면 그것은 문학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한이 없는 사람은 문학을 하지 못하는가? 결코 그런 것은 아니다.
다음의 이야기를 보자.
고조선 때의 일이다. 나루터를 지키는 병사(津卒)인 곽리자고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근무 중에 이상한 일을 구경하였다. 머리는 하얗고 호리병을 옆에 찬 노인네가 무어라 중얼거리며 강물로 들어갔다. '왠 미친 놈인가'하고 그는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침 그 노인의 부인으로 보이는 여인이 뛰어와 '강을 건너지 마라'며 소리쳤다. 그러나 노인은 물에 잠기고 여인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렇게 건너가지 말라고 당부하였건만 기어이 건너다 죽어버리니, 이제 나는 어찌 살거나'는 넋두리까지 늘어놓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 여인도 강물 속으로 들어가 빠져 죽었다. 집으로 돌아온 곽리자고는 낮에 구경한 일을 아내인 여옥에게 들려주었다. 남편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무엇에 홀린 듯이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벽에 걸어둔 공후인을 내려서는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불렀다.
公無渡河 임은 강을 건너지 마오. 公更渡河 임은 그예 강을 건너셨네. 墮河而死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 가신 임을 어이할꼬.
여옥이 부른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나라 사람들이 부르는 애절한 노래가 되었다. 이것이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이다. -'해동역사'에서
이 이야기에서 여옥이 부른 것도 문학이다. 그러나 앞의 복두장이 부른 것과는 다르다. 복두장의 경우가 자신이 직접 본 사실에 대한 토로라면 여옥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에 대해 자신의 감정을 토로한 것이다. 생생하게 목격한 곽리자고는 별다른 감정없이 '왠 미친 년놈들인가'라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남편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들은 여옥은 그렇지 않았다. 물에 빠져 죽은 부부의 이야기를 마치 자신이 직접 당했다거나, 혹은 자신이 직접 보고있는 듯이 노래하고 있다. 이것이 문학이다. 비록 자신이 당하거나, 직접 본 것은 아닐지라도, 혹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거나, 혹은 책이나 신문에서 읽거나, 혹은 TV나 영화에서 보거나 한 사실에 대한 감정이 당사자의 것처럼 한이 되어 가슴속에 남아있다가 언어로 터져나온다면 이는 훌륭한 문학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은 무엇인가. 문학이 무엇인가가 해결되었으니 이는 간단한 문제이다. 소설도 문학이다. 다만 일정한 이야기를 담고 있을 뿐이다.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은 사건이 있고, 그 사건과 관계되는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이 활동하는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설을 쓰는 사람은, 즉 작가는 앞에 열거한 사건, 인물, 시간, 공간 등을 모두 직접 경험한다거나 혹은 동시에 다 들은 것은 아니다. 여기에 상상력과 허구라는 문제가 결부되는 것이다.
다음의 이야기를 보자.
'허생전'은 박지원의 기행록 '열하일기(熱河日記)' 가운데 '옥갑야화(玉匣夜話)'라는 부분에 들어 있다. 작자가 북경(北京)에서 돌아오는 도중 옥갑이라는 곳에서, 동행한 여러 비장(裨將)들과 더불어 밤새 나눈 이야기를 옮겨 적은 것이 '옥갑야화'이다. 역관(譯官)의 돈벌이가 그 날 밤의 화제였고, 전대(前代)의 역관 변승업(卞承業)이 큰 부자가 된 이야기에 이르자, 작자는 이와 관련하여 윤영(尹映)이라는 노인에게서 들었다는 허생의 내력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바로 이 부분이 '허생전'으로 불린다. - 윤병로,'문학과 현실' 중에서
진정으로 박지원이 윤영이란 노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허생전'으로 옮겼는지, 아니면 당시 사대부들의 비판을 모면하려 빠져나갈 구멍을 준비해 둔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소설의 한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누구에게 들었어도 좋다. 자신이 직접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도 좋다. 아니 자신이 직접 당한 것이라면 더욱 좋다. 한마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혼자 알게 된 복잡다단한 이야기, 그것이 오랜 시간에 걸쳐 가슴속에 저며오도록 담겨있다가 어느 순간 이야기가 되어 나왔을 때, 그것이 바로 소설이 된다. 박지원이 실제로 윤영에게서 들었다고 치자. 혼자만 들었을까. 아닐 것이다. 여럿이 함께 들었어도 그 이야기를 통해 박지원만이 느낀 무엇인가가 가슴속에 남았을 것이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박지원의 가슴 속에서 여러가지 살이 붙어 한 편의 이야기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분명 들은 순간 [허생전]이란 소설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들은 내용 100%가 그대로 [허생전]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박지원이 윤영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한 이야기라도 좋다. 무엇에선가 [허생전]의 모태가 된 사건을 경험하였거나 보았거나 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이야기로 만들어지기까지 박지원의 가슴속에서 오랜 동안 삭았을 것이다. 박지원은 그렇게 삭히면서 처음에 느꼈던 것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다른 형태의 이야기로 발전시켰을 것이다. 이름하여 허구, 거짓말이다. 즉 박지원은 그럴듯하게 꾸며내었던 것이다. 이를 윤색했다고 말하는데 이는 몰라도 좋다. 요점은 꾸며낸 이야기라는 점이다. 소설은 이야기이다. 그것도 꾸며낸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느낌이 시간이 지나면서 말하지 않고는 못견딜 이야기로 발전하였고, 이것이 정리되어 표현된 것이 소설이다. 그렇다고 단순히 흥미만을 주는 이야기여서는 안된다. 아무리 소설을 허구라 해도 그 속에 인생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것은 바로 가슴 저미는 고통 속에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즉 한이 서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야기는 흥미만을 주지 않는다. 무엇인가 가슴속에 남을 감동을 준다.
허구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허구'란 무엇인가? 소설의 특성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허구의 문학'이라 한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거짓말의 문학이다. 그렇다면 소설은 거짓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소설은 결코 거짓말로 된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에서 '허구'란, 소설 속의 내용(그것이 인물이건 사건이건 간에)이 거짓말이란 뜻이 결코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을 김동인의 [감자]란 단편을 보자.
전체 아홉 개의 단락으로 기술된 작품의 내용은 이렇다.
1-① 복녀는 원래 가난은 하나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있게 자라난 처녀였다. -② 그녀는 열다섯 살에 80원에 팔려 홀아비에게 시집을 갔다. -③ 게으른 남편때문에 소작농, 막벌이, 행랑살이를 거쳐 거지가 되어 평양 칠성문 밖 빈민굴로 들어온다. 2. 그 빈민굴에서도 복녀 부처는 제일 가난하게 지냈다. 3. 기자묘 솔밭 송충이 잡이에 지원하여 일하다가 감독과 간통한다. 4. 이 일로 그녀의 인생관과 도덕관이 바뀐다. 5. 그녀는 거지에게까지 매음하며 그리 궁하게 지내지는 않게 되었다. 6-① 왕서방의 감자밭에 들어간 복녀는 왕서방에게 들킨다. -② 왕서방의 집에서 나오는 복녀의 손에는 3원이 쥐어져 있었다. 7. 왕서방과 복녀는 수시로 만나고, 복녀 부부는 빈민굴의 부자가 된다. 8-① 왕서방은 백원을 주고 어떤 처녀를 마누라로 사 온다. -② 왕서방의 혼인날 밤 복녀는 낫을 들고 왕서방의 방으로 들어간다. -③ 복녀는 왕서방에게 낫에 찔려 죽는다. 9-① 복녀의 시체는 사흘후에야 그녀의 집으로 옮겨진다. -② 왕서방은 복녀의 남편에게 삽십원, 한방의에게 이십원을 준다. -③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이라는 한방의의 진단으로 공동묘지로 간다.
세밀하다거나 정확한 구분은 아니지만 편의상 9 개의 단락으로 나누었고, 여기에서 다시 16 개의 에피소드를 뽑아보았다. 김동인이라는 작가는 앞에서 설명한 복두장이나 여옥처럼 9 개 단락의 내용, 혹은 16 개의 에피소드 중 대부분을 경험했거나, 들었거나 아니면 보았을 것이다. 김동인이 경험했거나, 들었거나 아니면 보았을 에피소드들은 대략 이러한 것들이리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보다 훨씬 더 많거나 적을 수도 있다.
① 어린 나이에 80원에 팔려 홀아비에게 시집간 어떤 처녀. ② 소작농, 막벌이, 행랑살이 등 온갖 고생에도 불구하고 거지가 된 어떤 부부. ③ 송충이 잡이에 지원하여 일하다가 감독에게 정조를 빼앗긴 여인. ④ 평양 칠성문 밖 빈민굴의 모습. ⑤ 남의 집에 물건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들켜 주인에게 몸을 빼앗긴 여인. ⑥ 아내가 몸을 팔아 온 돈을 보고 히히덕거리는 놈팽이. ⑦ 돈을 주고 처녀를 사오는 혼인 풍습. ⑧ 혼자 좋아하던 남자의 결혼식날 신방에 뛰어든 간 큰 처녀. ⑨ 살인을 뇌일혈로 무마해버리는 부도덕한 한방의사.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김동인이 위 9 개의 에피소드들을 일목요연하게 한꺼번에 들었느냐는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①의 '어떤 처녀'가 ⑤의 '여인'이 아니며, ②의 '어떤 부부' 중 남편이 ⑥의 '놈팽이'가 아니다. 또 ③의 '여인'이 결코 ⑧의 '처녀'가 아니다. 즉 ①에서 ⑨까지의 에피소드와 인물들은 각각 별개의 것으로 존재했던 것들이다. 이를 김동인이 경험했거나 들었던 것도 각각의 에피소드들 간에 시간적 혹은 질적인 차이는 클 것이다. 다만 김동인은 이 9 개(혹은 그 이상)의 에피소드들을 서로 연결시켜 그럴듯한 하나의 이야기 - 가난과 애욕 때문에 죽음에 이르는 복녀라는 여인의 삶 - 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서로 다른 시간과 서로 다른 장소에서 벌어진 사건과 인물들을 적당히 연결시켜 마치 서로가 연관이 있는 것처럼 꾸며냈다는 것이다. 여기에 결부되는 것이 바로 작가 김동인의 상상력이다. 위에 열거한 9 개의 에피소드들은 분명 김동인이 생존해 있을 당시 있었던 일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결코 연관된 것이 아니라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별개의 사건과 인물을 마치 '복녀'라는 여인의 행위 혹은 그녀와 관련된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일, 이것이 바로 작가의 상상력이요, 이렇게 작가의 상상력으로 꾸며진 얼개를 우리는 허구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김동인은 위에 열거한 단 9 개의 에피소드만으로 [감자]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9 개 이외에 수많은 김동인의 지식과 경험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복녀'라는 한 인물과 그 삶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물론 역사소설도 허구이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 시절에 학생들로부터 당시에 인기있었던 사극의 내용에 대하여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정말 그때 그사람이 그랬느냐는 질문이다. 소설이나 TV드라마 대본이나 형식의 차이는 있을망정 허구임에는 다름이 없다. 소재, 즉 작가가 가슴으로 느낀 사건이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왕조의 이야기거나 역사적 인물일 뿐 그가 만들어낸 작품은 허구이다. 역사소설을 읽고, TV드라마를 보고 그것이 역사이거니 착각하지 말라. 그것은 다름아닌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건과 인물을 소재로 작가가 그럴듯하게 꾸며놓은 허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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