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창작론

소설작법 <말하기와 보여주기>

글길_문학 2009. 12. 2. 15:40

(1)보여주기의 예


헨리가 경영하는 식당 출입문이 열리더니 두 사나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카운터를 향하여 앉았다.
"무얼 드릴가요?" 하고 조지는 두 사나이에게 물었다.
그들 두 사나이 중 하나가, "난 잘 모르겠는걸. 여보게 자넨 무얼 먹으려나?" 하고 말했다.
"나도 몰라. 나두 무얼 먹고 싶은지 모르겠어." 하고 엘이 말했다.
바깥은 어두워오고 있었다. 창문 밖 가로등에는 불이 켜졌다. 카운터 앞에 앉은 두 사나이는 메뉴를 읽었다. 카운터 저쪽 끝에서는 닉 아담스가 이 두 사나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닉은 함께 이야기 하고 있었다.

-헤밍웨이, '살인자'


이 소설은 <보여주기>의 예로써 많이 활용되어 왔었다. 작가가 설명한 부분이 많아서, 그것이 <말하기>의 방법인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설명조차 <보여주기> 방법인 것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우선 그것은 작가의 감정이나 판단을 섞지 않고, 인물이나 사건을 눈앞에 보이는 그대로만 적고 있다. 그리고 독자와 같은 거리에 서서 그것을 예의 주시할 뿐이다.
이런 소설일수록 작중인물들의 행동이 돋보인다는 점이 특징이다. 활동사진의 한 장면처럼, 공연중인 연극의 무대처럼, 감독이나 연출가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오직 인물과 사건과 장면이 소설 속에 가득할 뿐이다.

(2)말하기의 예

연구실을 개방하는 면에 있어 나는 교수들에 비해 비교적 인색한 편이다. 교수의 연구실이야 당연히 학생들이 드나들 수밖에 없는 장소로 되어 있긴 하나 그래도 너무 함부로 개방을 하다 보면 별별 일이 다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내 연구실엔 따로 조교를 두지않고 연구실을 비울 때는 꼭꼭 문을 잠그고 다니며, 어떤때는 안에 있을 경우라도 밖에 <부재중>의 표시를 해 놓는 수가 많다. 사람에 따라서는 좀 지나치다고 생각 할지도 모르는 나의 이런 면을 눈치 빠른 녀석들이 모를리가 없다.

이런 글은 화자외에 다른 등장인물이 없다거나, 그 안에 다른 사람과 주고 받는 대화 같은 것이 없이, 그냥 화자가 일방적으로 서술한대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상대적인 인물이 있고, 그 인물과 어떤 대화를 주고 받더라도, 그것은 처음부터 보여주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말하기를 위한 것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도 난희는 여전히 가만히 있다가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고 천천히 좌우로 내저으며 눈은 허공을 향한 채 말 했다. "저로서야 거부하고 싶었지만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어요. 그의 뜻이 옳다고 생각되어지는 걸 어떻게 거부 하겠어요?" "옳다니? 스스로 목숨을 끓는 게 옳은 일이라는 이야긴가요?" "목숨을 끊는 일만이 아니라 모든 일이.....(중략)"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는 일조차를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이 여자의 이디에 이런 당돌 함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최창학,'하늘과 무덤'

이런 화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과 어떤 거리도 주지 않는 점이 특징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대상 앞으로 바싹 다가가서, 가능하면 그 속 마음을 들여자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 관찰을 말함에 있어, 자기 판단이나 감정까지를 섞는다. 이런 소설은 인물이나 사건보다는 작가의 의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점이 특징이다.>

(3)혼용된 예
보여주기와 말하기를 엄격히 구분해서 사용하기는 어렵다. 가장 큰 이유는 소설이 서사적 구조물이라는 점 을들 수 있다. <보여주기>로만 일관하면 사건의 진전이 약화되고, <말하기>로만 일관하면 장면 또는 상황이 제시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소설은 거의 보여주기와 말하기를 혼용하여 쓰는 것이 원칙이다.

현태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있을만한 곳으로 여기저기 전화를 해보았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화를 받았던 어떤 동료 교수 한 사람은 현태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신 그를 입원시키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정중히 제의해 오기도 했다.
"가볼 데가 있다."
아침식사를 마치자 어머니 이씨가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었다.
"거길 가시게요?"
준태가 묻자 "서둘러라. 마침 잘 본다는 노인 한사람을 사놨다."
"나도 모르겄다. 니 애비 붙들고 물어나 보자!"
이젠 더이상의 만류가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진즉부터 어머니 이씨는.....


인물 만들기와 사건 만들기

(2)말하기 방법을 통한 성격 형성
새로 태어난 유자는 이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단계적으로 완성되어간다. 그 시간에 따른 단계가 바로 사건이다. 사건은 반드시 그 안에 어떤 의미, 또는 이미지를 가져야 한다. 무의미한 시건은 사건이 아 니다. 이미지를 내포하지 않은 인물은 인물이 아니다. 사건과 사건이 얽혀 하나의 소설로 완성되듯, 그 안에 있는 여러 이미지들이 모여 결국 하나의 인물로 완성되는 것이다.

세상일에 무관한 이미지

(1)졸음은 마치 그녀의 천성의 일부인 것처럼 보엿다. 아틀리에에 처음 데리고 와서 예의 그 소파를 가리켰더니 사방을 두리번 두리번하던 멍청한 그 눈길 그대로 몇시간이고 꼼짝않고 앉아 있어서.....

그림에 상당한 관심과 안목을 가진 사람의 이미지

(2)"이 그림은 재미 있어요." 그녀는 무너져가는 인물의 코 부근을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얼른 뗐다. "마치 허물어져가는 듯해요"

대인관계에서 몹시 불안해하는 사람의 이미지

(3)이혼한 남편은 장거리 전화를 받는 그녀의 모습은 고집스럽고 애먜하고 우스꽝스러운 데가 있어서, 보는 사람이 불안할 지경이었다.

정치적 관심을 가진 사람의 이미지

(4)"지섭씨." 하고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더니, 그는 갑자기 뛰어 일어나 내 가슴을 잡아뜯고, 쾅쾅 두들기고, 드디어 거기 매달려 훌쩍거리고 울기 시작했다. '그것이 근대화예요? 저것이 5개년 계획?..... 내 것 내가 해결했습니다. 하는 저것이?"

새로 완성된 <유자>는 우리 세대의 잘못된 근대화가 파생시킨 기형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과리된 이상과 현실의 틈 바구니에서 시달리다가, 광기와 발작으로 죽어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띠게 된다. 이제 원하는 인물이 완성되면 소설은 끝날 수밖에 없다.

화법으로서의 <말하기>나 <보여주기>는 따지고 보면 그것들은 사건을 전개라고 인물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방법적 선택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다. 소설이란 어차피 <인물 만들기>요, <사건 만들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다시말하자면, 소설은 처음부터 완성된 인물이 등장하여 벌이는 완벽한 사건이 아니다. 미완의 인물들이 등장하여 완성된 인물이 되기까지, 그 과정이 바로 소설이다. 처음에는 어린아이로 태어났다가 점점 자라면서 인격이 형성되듯이,작중 인물도 그래한다. 들장하고 난 뒤에 그 안에서 점차 시간을 두고 성격을 형성해나가는 것이다.

(1)작중인물의 탄생과 성장

작중인물이란, 어지까지나 소설의 진행과 함께 그 안에서 다시 형성된 인물이 아니면 안 된다.

남유자의 본명은 문자, 1942년 밀양 생, 여섯 살때 부산으로 이사해서 거기서 S여중고교를 다녔다. 부친은 남신주 화백이다.(중략) 61년 상경해서 Y여대 서양학과에 입학, 졸업과 함께 결혼에 들어갔으나 1년 뒤에 이혼, 유지라는 이름은 이혼한 남편의 성에서 딴 개명이다. 이혼한 이유같은 것은 확실치 않다. 그녀 자신은 <영구 불임증>임이 드러났기 때문에 이혼당한 것이라고 큰소리치고 있었으나, 그 후의 여러 가지 일들로 추측해 보아 거짓임이 분명하다. 이혼한 다음해인 68년 9월, 자신도 모르고 있던 지병인 위암으로 몰, 향년 27세

-이제하, '유자약전'

유자는 이런 식으로 화자인 나를 만나면서 다시 태어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나에 의해서 재 구성된 유자이지, 원래 등장할 때부터 가지고 온 이력서 대로의 유자는 아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유자의 전 생애애 걸친 이야기도 아니요, 다만 죽기 전 1년간의 생애에 불과한, 그것도 나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능한 이야기다. 그 짧은 생애를 통해 작가는 그가 추구하는 인물의 또 한 생애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그것은 오직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인 것이다.

(3) 모여주기방법을 통한 성격 형성

(1)웬 낮선 사내가 역 앞 정류장에 서 있다. 그는 헌 농구화를 싣고 검정 쭈구럭 가방을 옆구리에 끼었다. 그는 버스를 타려던 생각을 버리고 반대방향으로 걸어갔다. 마침내 그는 잔교 옆의 술집으로 들어갔다.

'뒷개'의 첫 장면을 간략하게 요약한 글이다. 원래는 꽤 긴 글이었다. 그것은 맨 처음 상황을 전개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작가가 직접 설명해주고 있었다. 설명이라고는 해도 엄격히 말하면 이 부분은 묘사에 가깝다. 윗글처럼 필자가 요약하면 설명이 되지만, 원래는 작가가 쓸 때는 묘사를 목적으로 썼다. 설명을 듣는 동안 독자는 의문이 생긴다. 사내는 어떤 사람인가. 왜 술집에 들어갔는가. 술집에 들어가서 누구를 만날 것인가. 그리고 무슨 짓을 할 것인가. 그러자 이번에는 설명을 중단하고 작중인물들을 시켜 대답을 확인시켜주었다.

(2)"어서 오시요."
댓방 아줌마가 배추를 다듬으면서 말했다.
"날세"
사내가 탁자가 위에 쭈그러진 가방을 팽개치듯 내려놓고 그 앞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말했다. 가게안에 딴 손님은 없었다.
"아이고! 뭣 헐러고 또 오요!"
여자가 배추포기를 내던지고 일어서서 두 팔을 늘어뜨리고 말했다.
"막걸리나 한 잔 주소. 서울서 지금 막 내여오는 길이네. 어서 가시요. 영달이가 학교 파하고 들어올 때가 됐오. 가 오기 전에 얼렁 가시요."

윗글로 전달 받은 사항을 요약하면 대충 이런 내용이다.

그들은 부부사이다. 그 사이에 영달이라는 아이가 하나 있다. 그들은 썩 사랑스럽지 못한 관계다. 그들은 지금 각각 떨어져 살고 있다. 사내는 서울에서, 아내는 고향에서. 지금 무슨 일 때문인지, 사내가 아내를 찾아왔다. 그러나 아내는 그를 반겨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충>이지 결코 완벽한 설명은 아니다. 그것들을 완벽하게 설명해내는 것도 사실 불가능 한 일이다. 작가 조차도 이 문제는 불가능하니까. 대신 작중인물들을 대치시킨 것이라고 보면 된다. 이때가 바로 설명을 포기하고 그 대신 작중인물들의 상황으로 바꾸어줄 때가 아닌가 한다. 설명은 일반적이지만, 행동은 구체적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상황을 설명할 때는 작가가 책임질 수 있지만, 구체적인 사항을 설명할 때는 작가가 빠지고 그 대신 작중인물들이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게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일단 행동이 시작되는, 그 다음 얼마 동은은 그들 스스로가 사건을 떠캍는다. 그들끼리의 스토리를 전개하고 성격이 형성되기도 한다. 이쯤에서 소설은, 그것을 작가가 끌고 간다기보다 그 자체로 굴러간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작중인물들한테만 소설을 떠맡겨둘 수는 없는 일이다. 알맞게 그들이 자기 할 일을 마치면 다시 작가가 나서서 대신 설명을 해주어야 한다.

(3)"나, 가네"
사네가 사발을 내려놓고 밖으로 났다.
"다시는 오지 마시요"
여자가 말했다.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낀 햇살을 등으로 가득히 받으면서 뚜벋뚜벅 걸어갔다.
그는 버스 정류장에서 걸음을 멈췄다. 선흥 잔교 앞이었다. 어린애를 업은 젊은 여자가 손구루마 앞에서 앉아서 냉차를 팔고 있었다.

-이상 1,2,3 서정인 '뒷개'

장면을 바꾸려니까, 작가가 나서지 앉을 수 없었다. 조금 앞 부분까지만 해도 사내가 있는 곳은 술집이었는데, 몇줄 지나자 장소가 선흥 잔교 앞으로 바뀌었다. 이제 다음 장소로 옮겨가서 다시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는 작가가 계속 설명을 떠맡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기이다.
소설은 어차피 말하기와 보여주기의 반복일 수 밖에 없다. 다만, 어느 때 보여주고, 어느 때 말할것이냐가 문제일 뿐이데, '뒷개'에서 그것은 장소를 이동할 때와 붙받이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 말할 때를 엄격하게 구분하여 쓰고 있었다. 장면을 전환할 때는 말하기 인물과 사건을 소개할 때는 보여주기, 그래서 이 소설은 각각 여섯 차례 말하기와 보여주기가 반복되다가 끝을 맺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보여주기 화법은 작가의 의도를 사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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