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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紅枾)

글길_문학 2009. 11. 19. 19:26

인생 질곡의 세찬 물살에 뻗어 드문 드문 솟아나는 삶의 기억처럼,
산맥도 기억과 형상에 어떤 굴레를 이루며 무언의 형상으로 서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런 산형의 지세가  펼쳐진 곳이 어쩌면,
왕골을 쪼개듯 노령산맥이  줄기차게 뻗어 고성산,태청산, 장암산을 만들어 장성군과 경계를 이루어 놓고,
 남쪽으로는 불갑산, 모악산, 군유산을 힘차게 솟구쳐 함평군과 드높은 산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서쪽으로는 첨산인 봉화령, 수리봉 등을 대봉처럼 처럼 만들어 놓았다.
 운무에 잠기듯 신비롭게 역사의 옷자락속에 살짝 감춰진곳,
백제 근초고왕 이후 무시이군이라 잠시 불리다가,
 삼국 통일 후  장사, 무송, 고창의 세 고을을  관할하는 무령군으로 개칭되었다가
고려 940년 신령스런 빛이 뿜어내는 땅으로 명명 되었던곳이 옥당골 영광군이다.

 

 영광읍에서 해풍 내음을 맡으며 30리쯤 더 들어가면 막힌 숨이 탁트이 듯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고,
 설경이  매화의 자태처럼 아름답다고 불리우는 설매산 자락 아래
1970년대 후반 조그마한 초가 마을들이 끊어 질듯  이어져있고,
 새마을 운동과 함께 새롭게 다듬은  신작로가 황토와 자갈속에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고 있었다.
유년시절 풀잎에 맺혀 햇살에 아롱거리던 이슬과 같은 순수와 동화속같은 보라빛 동경이 깃들던 고장,
학교를 가거나 집에 가려면 늘상  걷기만 했던 슬프도록 가난했던 시절..!
 말표 고무신을 신고 신작로를 걷다보면,
불쑥 뿔쑥 툭 튀어나온 자갈 돌에 잘못하여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꾸지뽕 가시에 찔리는 듯 무척이나 발바닥을이 고통스러워 화들짝 놀랄때가 많았으며,
정말 정신이 번쩍나 간혹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기가 일쑤였다.
신작로길에 때로는 멀리서 흙 먼지를 몰고 오는 트럭이 잠시 스쳐 지나가면,
온통 머리엔 황토 먼지를 뒤집어 쓰고 고구마를 급하게 먹다 가슴이 체하듯 숨쉬기 어려울때가 많았다.
하지만 신작로는 드넓은 우주에 전파 망원경에 잡힌 불규칙한 외계의 신호음처럼
우리 유년시절엔 항시 무언가 새로운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작은 동경의 길이었다.


특히 바람이 조금 세차게 불기라도 하면
추수가 끝난 황량한  빈 들판엔,
허수아비의 단추 풀린 겉옷이 하얀 억새꽃처럼 날리고,
허공엔 배고 픈 참새가 어지럽게 창공을 비상하다가  가끔씩 아픈 다리를 전신주에 나그네처럼 앉아 쉬기도 하였다.
신작로의 길옆에  길게 늘어선 전신주마다 평야 끝 바닷가에서 가끔 거칠게  해풍이 불어올때면,
하모니카의 낮은 도의 음처럼 전신주는 미묘하고 슬프게 울때가 많았다.
어쩌면 그것은 초등학교 마지막 수업을 끝내고 타학교로 전근가는 잊혀진 어느 여선생님의 마지막 슬픈 인사말같기도 했으며,
한편으론 농촌 풍경과 농부들을 좋아했던 빈세트 반 고흐 조차 그리지 못했던 템페라가 덜 마른 수채화 같은 농촌 풍경이기도 했다.

 

추억속의 그날도
국어 수업 시간에 반대말 쪽지 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시험 문제는  "발전"의 반대말이었고,
정답은 퇴보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초등학생에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어려운 시험 문제였다.
결국 학급 전체중 정답을 맞추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고 화가 난 선생님한테
플라타너스 가지줄기로 손바닥이 통통 붓도록 맞은채 많은 숙제를 안고 방과후 학교를 나왔지만,
우린 곧장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개구쟁이 친구들과
 마을 뒷산에서 마른 잔듸 풀과 솔방울을 주워 모닥불을 피우며 옹기종기 앉아 놀고 있었다.

 

봉덕산 아래 조금 떨어져있는 마을 뒷산은 신작로를 바라보기에 참 좋은 전망대였다.
산 뒤쪽에서 바라보면 드넓은 들판 끝에 칠산바다가 석양빛에 수평선 가득 곱게 붉게 물들을때가 많았고,
몸을 돌려 학교가 보이는 앞쪽을 바라보면, 
한눈에 보이는 황토빛 신작로는  들판가운데 오솔길처럼 펼쳐져 있었다.
늦가을 산들바람을 리듬삼아 여치와 귀뚜라미가 울다 지쳐 놓고 간듯한
코스모스 삭정이가 짙은 갈색으로 하늬 바람에 힘없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때 하얀 먼지를 나부끼며,
나의 검은 동공속에 한대의  버스가  신작로 길을 질주해오고 있었고,
흙 먼지가 먼저 도착하는 듯 하더니 잠시 후 마을 동구밖 앞에 차가 멈췄섰다.
간혹 한적한 시골 마을에 한 두 사람 정도 버스에서 내리는데,
그날은 어림 잡아도 열명이 넘을 정도  많은 사람들이 버스에서 내렸다.
잠시 후 차가 떠나자 차에 가렸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하얀 두르마기에 중절모를 쓴 사람,
등짐에 무언지 메고있는 사람,
하얀 무명보자기에 무엇가 들고 있는 사람들....,
무료한 우리에겐 무수한 사람 만큼 많은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는데,
 버스에서 내린 사람은 동구밖길을 따라 마을 초입길로  들어서지 않고,
곧장 교회 뒷편길을 따라 우리가 놀고 있는 마을 뒷산을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올라 오는 좁은 오솔길 주위엔,
물억새와 개억새그리고 억새아재비가 무성하게 자라 하얀 억새꽃을 가득 피운채 추풍에 서걱대고 있었고
일찍 개화하여 꽃잎이 떨어져 나간 억새꽃은 마른 까끄러기가 되어 오르는 사람들의 얼굴과 손을 간지럽히는듯했다.
잠시 후 올라온 사람들은 산을 오르지 않고 산밑에 있는  한뼘쯤 되는 황토밭에 모두 짐을 내려 놓았다.
고추를 심었던 황토밭 마른 고추나무엔 하얂게 희나리가된 고추가 아직도 서너개씩 매달려 가을을 붙들고 있는 듯 했다.

 

조용한 침묵속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중 연장자로보이는 노옹(老翁)이 긴 장죽을 연신 빨아대고 있었고,
늙고 마른 얼굴이지만 머리엔 망건을 쓰고 그위엔 검은 통영갓을 쓴 폼이 꽤나 근엄하게 보였다.
그옆에 나란히 선 마르고 작은 체구의 작달막 한 육순의 노옹은,
 하얀 두루마기에 누런 초립을 쓰고 있었으며 침묵을 깨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선주님,
 이곳은 비록 주산(主山)이 낮아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는 아니지만, 앞으로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있고
뒤로는 아담한 산이 여자의 치마처럼 상형(裳形)을 이루고있어 발복의 지세라 참 좋은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넓은 평야는 곡식이 풍부해서 재물이 다복 할 지세며,
뒤에 주산(主山)이   여자의 치마처럼 상형(裳形)을 이루고있는 것은 자손이 번창할 수 있어 남도에 으뜸가는
길지인것 같습니다."


그제서야, 한동안 장죽을 빨던 노옹이 입을 열었다
 그는 낙월도(섬의 모양이 달이 떨어지는 것과 같다 하여 낙월(落月)이라 했음) 에서
 수십척의 새우잡이 배을 갖고있던 선주였기에 대부분 사람들이 선주님이라 불렀다.
"영민하신 지관선생의 식견이 대단하신것 같습니다.
 과연 소문대로 듣던 명불허전(名不虛傳)의 빈 말은 아닌것 같습니다. 허! 허!"
"선주님!
과공비례(過恭非禮)라 했습니다.지나친 칭찬같습니다"라고 하며
잠시 허리를 구부리며 겸허을 표하던 황색초립을 쓴 노옹은  젊은 시절 한때 풍수에 빠져 팔도의 명산를
동가식 서가숙하는 유랑속에 지세를 익혔으며, 반평생 남의 묏자리를 봐주며 낙월도에서 살아온 풍수쟁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그를 장풍수라 했다.
겸허한 자세로 반쯤 허리를 구부리자 옥색조끼에 마고자를 입고 겉옷은 두루마기를 입었지만,
 애써 격식을 차려입은 황옥같은 누런 마고자의 단추가 살짝 삐져나와 멋적게 햇빛에 반짝였다.
그는 서둘러서 묵직히 싼 보자기를 풀었고 그 속엔 단단한 박달나무 함이 모습을 드러났다.
묵직한 박달나무 두껑을 열고
그는 죽은 사람의 안장지인 음택지를 잡기위해 뜬쇠를 꺼내어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한동안 이곳 저곳 왔다 갔다 하더니,
혼자 만족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밭에있는 대나무로된 고추막대를 뽑아 직사각형을 그렸다.
개혈(開穴)(시신을 안장하기 위해 땅을 파는 행위)자리를 정한듯 했다.

 

잠시 후,토지신에게 토신제를 올리기위하여
검게 탄 얼굴에 오십줄로 보이는 상복을 입고 장자인듯한 사람이,
담양 산 죽제품인 사각말석을 열고 미리 준비한  제물을 진설한 후 술을 올리고 절을 두번올렸다.
이윽고 낭랑한  축문이 풀잎을 적셨고, 눈동자엔 잠시 눈물이 반짝이는듯했다.
그리고  잠시 읍(泣)을 하는듯 하더니 술을 묘 주위 3번에 나눠 뿌렸다.
동행한 상주와 산역꾼들 모두가 함께 제사를 올렸다.
제사가 끝나자 산일을 하기위해 동네서 올라온
산역꾼들이 고추나무와 잡풀을 걷어내고 삽으로 자갈을 골라낸 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열명 남짓 산역꾼들이 마른 겉흙을 한자 쯤 파내자 붉으스레한 황토흙이 나오기 시작했고,
조용한 주위엔 삽질하는 소리만이 들렸다.
가끔 흙속엔 잠자다 놀란 귀뚜라미와 톱날처럼 날카로운 발을 가진 땅강아지가 흙속으로  황급히 달아나기도 했다.


한시간 남 짓 땅을 파자 입관할 자리가 마련 되었다.
그러자 풍수의 지시로 관은 주도 면밀하게 나무 뿌리가 침투하지 못하는  최고급 오동나무 관을 하관했고,
잠시 후 시신 밑에 깔고 시신을 고정시키는 두께 다섯 푼짜리 검은 옻칠을 한 널판지 칠성판 놓았다.
 이 널판지에는 북두칠성을 상징해서 일곱 개의 구멍이 뚫려 있기 때문에 칠성판이라 부르는 것이다.
 칠성판에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일곱 개의 구멍을 뚫는 이유는
죽음을 다루는 신이 있는 곳인 저승이 바로 북두칠성이라고 생각하여,
 돌아간 이의 영혼이 저승인 북두로 곧바로 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듯 했다.

그때 우리 동리에 사는 임자양반이 칠성판위에 긴 감포(무명베)를 깔았다.
낙월도 섬 주위엔,
각이도·대각씨도·송이도·임자도가 있는데 그의 아내가 임자도에서 시집 온 후 동리사람들은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임자양반은 천성이 선하지만 어렸을때 천연두를 앎아  눈에 띄는 흉터를 남기는 농포 자국이 군데 군데 얼굴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외모와는 달리 그는 동리 사람들이 하기싫고 꺼려하는 일을 늘상 도맡아 하는 듯 했다.
오늘도 그는 오동나무 상자에서 한지에 쌓인 썩다만 유골을 꺼내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으로,
무명베에 향나무 끊인물을 적셔 납근이 덜된 유골들을 닦아내기 시작했고
간혹 육탈이 덜된 살점들을 바삐 손가락으로 뜯어내기도하였다
유년시절 나에겐 태어나 처음으로 바라본 사람 유골은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대 사건이었고 놀라운 광경이었다.

 

시신은 아직 납근이 덜돼어 부패한 검은 살점이 유골에 군데 군데 붙어 있엇다.
 마치 시체에 썩은 살점이 금방 돋아 나오 듯 했다.
주위엔 비린내섞인 송장썩은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는듯했다.
그 냄새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약한 냄새였다.
빙 둘러 바라보던 개구쟁이  친구들 모두가 연신 울렁거리는 속을 억지로 참아가며 연신 이맛살이 찌뿌리기 시작했다.
나도 속이 갑자기 메스꺼워지기 시작했고, 뱃속에 든 모든것이 금방이라도 왈콱 토할 듯 했다..
난 한마디로 내가 바로 맨손으로 시체를 딲는 느낌이었다.
난생 처음 바라보는 두눈이 움푹 들어간 무서운 해골과 유골들이었다.
 입안에 남모르게 연신 헛구역질이나고
그 냄새가 얼마나 심했던지.
나는 맥없이 황토밭에 주저앉을 뻔했다.
허공을 날던 까만 파리떼가 썩어가는 유골 위로 무수히 모여들었고,
매캐한 곰팡이 내음과 함께
육탈이 덜된 해골속엔 금방이라도 구더기가 기어나올 듯 했다.

이윽고 유골이 오동나무 관속에 머리 가슴 다리순으로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었고,
마지막으로 손가락뼈까지 모두 다 맞추어졌다.
임자양반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모시옷으로 연신 훔쳐내며,
곁에 놓아 둔 막걸리병을 들고  하얀 백자 사발에 넘실넘실 가득 한잔 따랐다.
막걸리 잔 속엔 시신 닦은 엄지 손가락이 한 마디쯤 깊게 잠겨 있었기에,
술잔속엔 부패한 살점이 금방이라도 동동 떠오를것만 같았고,
술잔 속에 잠긴 까맣게 때낀 엄지손가락의  손톱이 유골의 뼛 조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갈증난듯 막걸리 한잔을 단숨에 비우더니,
아무렇지 않게 또 한잔 따라 마신후 옆에 있는 홍어를 초장이 담긴 종지에 푹 찍어 게걸 스럽게 먹었다.
곁에서 이것을 지켜보던 난 내 입술을 지그시 깨물기  시작했고 썩은 송장물을 마시는듯 매스꺼워 지기시작했다.

 

하지만 잠시후 옆에서있는 내가 측은하고 배고파 보였던지,
"지성아!
옛다, 홍시 감 하나 먹어라!"하고
시신딲은 맨손으로 집어 나에게 내밀었다.
난 너무나 놀라 심장이 멈추어 버리는듯했고 창백한 이마엔 송글 송글 땀이 맺혔다.
이윽고 찰라의 순간이었지만,
 난 너무나 놀라 쫓기는 노루처럼 무작정 산등성이를 향해 숨이 차오를때까지 달아나기 시작했다.
등뒤에는 '하! 하! 하!' 하고 웃는  시신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후 솔밭에 주저앉아 무진장 애를 써가며,아까본 광경을
 지우고 다시금 지우려해도
내 몸에 묻어있는 썩은 시체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후로 난 유년시절 내내,
 간혹 홍시 감를 볼때마다 썩은 시체의 환영과 엮겨운 냄새가  되살아나
내 코를 심하게 찔러오며 비릿한 매스꺼움을  느낄때가 많았다.

 

오늘도 거실에서 아내가 유달리 좋아하는 붉고 말랑말랑하게 무르익은 홍시(紅枾)을
 한접시 내다 놓고 먹길 권해 보지만 ,
난 놀란 추억의 갈증을 해소하 듯 쓰디쓴 추억을 안주삼아 빈속에 맥주잔만 소리없이 기울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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